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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가 스톤헨지대에서 ‘부시는 미국을 불안하게 만든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조이스 스타디움으로 행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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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시의 사회보장제도 민영화는 우리의 미래를 빼앗는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연설이 시작되기 두 시간가량 전, 영국의 고대 거석 유적을 닮아 ‘스톤헨지’라 불리는 조그만 분수광장에 학생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4일 오후 3시(한국시각 5일 오전 5시). 학생들은 저마다 “부시의 사회보장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사회보장 사유화 반대” “거짓말은 이제 그만”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이나 작은 현수막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 대학 ‘평화연대’ 대표인 마이크 피터슨이 소형 확성기를 켜고 외쳤다.
“우리의 주장은 무엇인가!”
청중이 대답했다.
“부시를 돌려보내는 것!”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미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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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시 지지자들(길의 왼쪽)이 스타디움에 들어가기 위해 줄서 있다. 시위대(길 오른쪽)는 반부시 구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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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디애나 주 소도시 사우스 벤드에 자리한 노트러 데임 대학 교정에 전에 없던 정치적 구호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미국 제일의 가톨릭 명문대답게 이 대학은 보수적인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다. 최근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저자 이브 엔슬러가 학내에서 연설을 하려다 그 행사의 수익금이 낙태 여성을 지원하는 YWCA에 기부된다는 이유로 저지당하기도 했다. 이런 갑갑함에 반발한 시위로는 지난해 천 명가량의 학생에게 “게이가 뭐가 문제야?”라고 쓰인 오렌지색 티셔츠를 판 뒤 일부 학생들이 이를 입고 등교했던 게 가장 그럴듯한 것이었다. 이 보수적 교정에 잊혀져가던 저항의 불을 댕긴 건 바로 부시의 예기치 않은 방문이었다.
사회보장제 개정에 반대여론 높아
부시는 지난달 집권 2기 취임 연설에서 사회보장 제도의 전면 재검토를 천명한 뒤 사회보장세의 일부를 개인계좌로 돌려 주식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뼈대로 한 새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여론은 급격히 식었다. 지난 3일치 뉴욕타임스-CBS 공동 여론조사를 보면, 새 정책의 핵심인 사회보장세 사유화에 51%가 반대했고, 이 정책이 기존의 사회보장 연금을 감소시킬 수도 있다는 전제 아래 같은 질문을 하자 69%가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 사회보장 제도 수정을 정책의 최고 우선순위에 두는 것 자체에 반대하는 응답자도 63%에 이르렀다. 이런 여론 탓에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 내부에서조차 반발에 부딪치자, 부시는 민심을 돌리기 위해 이날부터 60일 동안 60개 도시를 방문하는 대장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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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대가 부시 입장을 기다리고 있지만 부시는 다른 통로를 이용해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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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 번째 방문지가 노트러 데임 대학인 것을 두고 정치학과의 나우니할 싱 교수는 “지지층이 많은 이 곳에서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도시 순방을 시작하려는 것 같다”며 “보수적인 가톨릭 인구 중에서도 부시 지지 여부는 나뉘어 있기 때문에(부시의 낙태반대 태도는 가톨릭 이념과 부합하지만 사형제도 등 찬반이 상충하는 정책도 있다) 이를 통합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고 분석했다. 부시는 지난 2001년 5월 이 대학 졸업식에 참석해 연설한 바도 있다. 마크 피터슨은 “평화나 경제정의와 같은 가톨릭의 긍정적인 메시지와 자신의 정책을 뒤섞어 그 약점을 물타기 하려는 게 아니냐”고 꼬집었다.
부시의 의도가 이런 것이었다면, 나름대로 성공한 면도 있었다. 이날 연설을 두시간 넘게 앞둔 오후 2시께부터 인근에 사는 지지자 6천여명이 행사장소인 이 대학 조이스 경기장을 찾았다. 보안검색 탓에 좀처럼 줄지 않는 줄은 1km남짓 장사진을 이뤘지만, 영하와 영상을 넘나든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다들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들과 2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민심이 표출되고 있었다. 스톤헨지에서 조이스 경기장까지 행진하는 동안 시위대는 3백여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민주주의란 어떤 것인가!”
“바로 이런 저항이 민주주의다!”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다!”
“(미국 사회보장 제도의 창시자인)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옳았다!”
“사회보장 사유화는 가라!”
시위가 시작된 지 한 시간. 부시는 학생들이 도열한 도로가 아닌 다른 접근로를 통해 행사장에 이미 입장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구호를 선창하던 ‘진보학생연대’ 대표 카메이리아 포터의 목은 벌써 쉬어버렸다. 시위를 주동자들이 쉼없이 펄쩍펄쩍 뛰며 절규하듯 선창하면 나머지 참가자들이 대답하듯 구호를 외치는 게 이들의 시위방식이다.
격렬하고도 거대했던 우리나라 학생운동 전통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다소 싱거워 보일 수도 있는 시위였지만, 몇가지 감안할 사정들이 있다. 쉽게 떠오르는 건 미국 대학생들의 개인주의 성향과 앞서 언급한 이 대학의 분위기. 마침 이날은 일주일 동안의 봄 방학이 시작된 날이다. 학생들이 전날부터 대거 빠져나가 교정은 텅 비어있었다. 학내 신문인 <옵저버>는 여행을 떠나는 많은 학생들이 부시의 방문 때문에 이곳 공항의 비행기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지 걱정하고 있다며, 대통령 전용기 이착륙을 전후해 15분간만 항공기 운항이 통제된다고 전했다(한 지역신문은 백악관의 보도자제 요청을 어기고 부시의 공항 도착 시간을 보도하기도 했다). 이날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은 여행 일정을 취소하거나 연기한 이들이었다.
한편, 이날 예상됐던 ‘공화당학생회’ 등의 부시 지지 집회는 열리지 않았다. 조그만 친부시 시위대가 눈에 띄었는데, 이들은 고등학교 2학년생 3명과 초등학교 5학년생 1명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잠시 뒤 정장 차림의 한 남자에 이끌려 행사장 안으로 사라졌다. 한 시위학생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얼마나 주고 고용했지?”
이들의 시위가 한국과 다른 또 한 가지는 ‘독재’와 싸우며 자라난 저항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저항이 앞으로도 그럴지는 알 수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시위 현장의 몇 가지 풍경이 자꾸만 그런 논리의 비약을 부추겼다.
‘예수의 가르침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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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이스 클라크(82,오른쪽)는 “나는 미국이 로마가 갔던 길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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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스 클라크는 여든두살의 할머니다. “나는 저항하려고 여기 나온 게 아니예요. 나는 아메리카를 사랑하기 때문에 여기에 왔어요.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많은 이들을 대신하는 거예요. 특히 싱글 맘(혼자 아이 키우는 엄마)들 생활이 자꾸 힘들어지는 게 참을 수 없어요. 미국인들의 권리가 점차 사라지고 있어요. 이건 예수님이 가르친 것과 달라요.” 클라크는 커다란 피켓을 든 채 3시간여 시위가 끝날 때까지 차가운 날씨를 견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위대의 10%가량이 인근에 사는 노인들이었다. 사회보장제도 변화에 가장 민감한 이들이기도 했지만, 이들의 열성은 그 이상을 말해줬다. 이 대학 퇴직교수인 버워드 도어링도 시위대 안에 있었다. 그는 “이 대학은 등록금이 비싸 부유층 자제들이 주로 진학한다”며 “이 곳에도 부시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기에 왔다”고 말했다.
시위대 중에는 세계 곳곳에서 온 유학생들도 많았다. 이들은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말라” “위협 제거를 구실로 한 선제공격 반대” “수단의 대량학살에 왜 눈감고 있나” “국제형사재판소를 부정하지 말라” 등 부시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피켓을 앞세웠다. 미국인들도 “미국은 세계의 경찰이 아니다” “세계는 미국식 질서에 반대한다” 등의 구호와 피켓으로 동조했다. 부시는 이날 연설에서 새 사회보장 정책 이외에 외교정책을 언급하면서 “나는 모든 이들의 영혼 깊은 곳에 자유에 대한 열망이 있음을 믿는다”며 “자유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준 신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시각 시위대는 “테러 혐의자를 시리아와 같은 ‘고문 국가’에 넘겨 미국 대신 고문하게 만드는 게 자유를 위한 것이냐”고 외치고 있었다.
이날 부시의 연설 도중엔 잠시 소동도 있었다. 부시가 연설에 들어간 직후 한 청중이 일어나 부시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한 것. 경찰과 보안요원들이 달려가 그를 눌러 앉힌 뒤 재발을 막기 위해 지키고 서있어야 했다. 일부 학생들은 지난해 미국 민주당 대통령후보 선거전에서 이라크전쟁 반대를 가장 선명하게 외쳐 ??은 층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던 ’하워드 딘’ 모습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무언의 시위를 벌였다. 부시의 연설을 지켜본 이 대학 학생 클레어 핼러렌은 “그의 말을 믿지는 않지만 직접 연설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기쁘다”고 말했다.
부시의 연설이 끝나고 인파가 쏟아져 나오면서 조이스 센터 앞은 마침내 절정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들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시위대와 ‘대치’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부시 지지자들은 시위대를 향해 손가락 3개 또는 1개를 들어보였다. 손가락 세 개는 부시의 이름 가운데 글자인 W를 뜻했다(손가락 한 개의 뜻은 대부분 독자들이 짐작할 것이다). 정장 차림의 신사들이 세 시간 동안이나 추위에 떨고 있는 노인과 학생들을 향해 보인 야유와 조롱의 언사는, 길 가다 낯선 이와 마주쳐도 가벼운 인사나 미소를 나누는 미국의 소도시 일상 문화와 너무나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거친 비난과 야유의 공방이 30여분간 불꽃을 튀겼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운전자들도 경적을 울리며 어느 한 쪽을 향해 손을 흔들거나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늦은 오후로 접어들어 주위는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부시의 외교정책이 국제사회와 미국 사이에 점차 깊은 골을 파놓고 있다면, 이 곳 조이스 경기장 앞 도로는 미국인 내부에서 깊어져가는 또 다른 균열의 상징처럼 보였다. 그 한편에는 잘 차려입은 신사, 숙녀들과 군인,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쓴 청년들, 장난기어린 고등학생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경제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대학생과 지식인들, 노인, 노동자, 소수인종 등의 군상이 있었다. 클라크 노인은 “미국이 로마제국을 닮아가는 것 같다. 나는 아메리카가 로마제국처럼 멸망의 길을 걷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사흘에 이틀은 눈이 내리는 지독한 겨울로 유명한 이 곳에서 이날은 운 좋게도 잔뜩 찌푸리기만 했지 눈만은 피하는가 싶더니, 시위대가 종종걸음으로 해산할 무렵 기어이 진눈깨비가 날리기 시작했다. 사우스 벤드의 날씨는 늘 이 모양이다.
사우스 벤드(미국)=박용현 한겨레 편집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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