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07 19:32
수정 : 2005.03.07 19:32
베이징에서 일하면 외국 기자들과 부닥칠 기회가 적지 않다. 우연한 기회에 일본 기자 한 명을 알고 지내게 됐다. 그는 나이보다 젊게 옷을 입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예의바른 신사다. 일본 안에서는 ‘진보’쪽에 가깝다고 자부했다.
한번은 그가 가지고 다니는 베이징 지도를 본 적이 있다. 이 지도엔 특정 건물에 빨강 동그라미가 인쇄돼 있었다. 이 표시가 뭐냐고 묻자 그는 “일본 공관·회사 또는 일본인들이 집중 거주하는 아파트”라고 답했다. ‘위급한 사정’이 생겼을 때 뛰어 들어가 도움을 청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일본인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는 중국인이 6.3%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난해 10월 중국사회과학원 일본연구소의 조사결과를 감안하면 베이징 거주 일본인들이 이런 지도를 만든 게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는 “중국인의 반일감정이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지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이때부터 그와 한·중 양국의 이른바 ‘반일’ 문제에 대해 토론하다 하마터면 그와 싸울 뻔했다. 나는 진심으로 일본을 위해서 “일본이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역사 문제를 깨끗이 털어내면 국가 이미지도 좋아지고 중국 등 이웃나라와 경제협력도 가속화해 일본의 국익에 훨씬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반응은 나를 매우 황당하게 만들었다. 그는 도리어 “한국과 중국이야말로 과거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다”고 몰아붙였다. 그는 한·중 두 나라의 ‘반일감정’이란 정치가들이 국내문제를 호도하기 조장한 거라고 주장했다. 가령 중국의 장쩌민 전 주석은 1989년 6·4 천안문사태 이후 피폐해진 민심을 돌리기 위해 열심히 반일감정을 조장했고, 한국의 역대 정권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나는 “독일 총리가 히틀러 등 전범자들의 위패가 안치된 사당에 가서 참배한다면 유럽 국가들이 가만히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야스쿠니 신사에는 도조 히데키뿐 아니라 다른 많은 일반 전몰자들의 위패가 있는 국립묘지와 같은 곳”이라며 “일본이 한국 대통령의 국립묘지 참배를 비난한다면 한국인들은 견딜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자신이 ‘꼴보수’가 아님에도 한국이나 중국의 친구들과 ‘과거사’ 문제를 얘기하면 결국 자신이 ‘꼴보수’로 전락하는 데 대해 분개했다. “한국과 중국이 계속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일본 안에서 자신처럼 ‘건전한’ 사람들이 설 땅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나는 일본 전문가가 아니지만 아마도 그가 보통 일본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게 맞을성싶었다.
그는 나와 언쟁을 벌인 뒤 심하게 몸살을 앓았고, 얼마 전 귀국했다. 나는 그가 매우 선량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선량한 지식인이 건전한 상식을 지니지 못하게 만드는 게 오늘의 일본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음악·영화·술 등 많은 문제에서 좋은 말벗이었지만 결국 그놈의 ‘과거사’ 문제 때문에 친구가 되기 어려웠다. 사람 하나 잘 사귀기 위해서도 그놈의 악성 종양 같은 집단주의의 망령을 걷어내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게 ‘정치적 동물’인 인간의 운명인 모양이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