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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1.17 18:21 수정 : 2006.11.17 22:44

시카고학파 거두 고 밀턴 프리드먼. 연합

케인즈주의 반대…자유방임·통화주의 주창
신보수주의 지주…“이데올로기 치우쳐” 비판도

시장과 국가역할 숙제로 남기다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요구하지 마라. 당신도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묻지 마라.”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유명한 취임사를 뒤틀어 <자본주의와 자유>의 서문에 담은 밀턴 프리드먼의 말이다. 자유시장주의 경제학을 대변하는 ‘시카고학파의 태두’ 프리드먼(94)이 1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 병원에서 숨졌다.

정부의 역할 축소, 자유시장 확대를 주창한 그는 1980년대 이후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정권과 영국 대처 정권의 신보수주의 정책의 이론적 지주였다. 그는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와 함께 현대경제학과 실물경제 이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로 꼽힌다. 그의 경제철학은 통화연구를 통해 이론적으로 뒷받침됐다. 통화량이 경기변동에 끼치는 실증 연구를 통해 정부의 역할을 성장률에 맞춘 통화공급에만 한정하는 통화주의를 확립한 것은 그의 최대 성과로 평가된다.

밀턴 프리드먼 주요 경력
그의 명성은 60년대 후반, 시장과 경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 개입을 주문하는 케인스 경제정책이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의 동시 발생인 스태그플레이션을 불러올 것이라는 예측이 적중하면서 확립됐다. 자연실업률 개념에 입각한 이 업적으로 76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시카고대학 시절 형성한 시카고학파의 ‘시카고 보이’들은 자유시장에 입각한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전세계에 수출했다. 전성기는 80년대 레이건 행정부 때였다. 대통령 경제정책자문위원으로 활약하며 감세와 규제완화라는 레이거노믹스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하지만 80년대 중반 미국 금융산업이 위기를 겪고 통화운영도 예측이 어긋나면서 그의 통화주의 이론의 신뢰성은 큰 상처를 받았다.

그와 논쟁을 벌였던 로버트 솔로 매사추세츠대학 교수는 “82~90년 경기붐은 지출을 늘리고 세금을 감면한 레이건 행정부의 전형적인 케인스 정책 때문이라며, 이는 적자예산 확대의 고전적 사례”라고 <뉴욕타임스>에 반박했다. 현대경제학의 또다른 거두인 폴 새뮤얼슨은 “프리드먼은 자신을 과학적 인물로 생각했으나, 사실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열정으로 가득 찬 인물”이라고 비꼬았다. 그는 70년대 중반 민선정부를 쿠데타로 무너뜨린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독재정권에 경제자문을 해줘, 이것이 평생 흠으로 남았다. 그는 피노체트가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실시하도록 해 정치적 자유의 토대를 닦았다고 변호했다.

1912년 뉴욕에서 헝가리 이민자인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 졸업 뒤 대공황이 터져 실업자로 지내다, 그가 나중에 비판한 케인스 정책을 도입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 수혜자가 됐다. 재무부에서 이 정책 입안에 협조했다. 40년대 초반에는 대변인과 보좌관을 지내며 소득세 원천징수 등 케인스적인 조세정책을 도입하고 홍보하는 구실을 했다. 그는 초기 뉴딜정책들은 그런 중대한 상황에서 적절한 대응이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그가 정부의 역할을 마냥 부정한 것은 아니다. 저소득자에게 정부가 보조금을 주는 역소득세, 저소득층 자녀에게 사립학교에 다니도록 보조금을 지급하는 바우처제도 등을 주장했다. 그는 정부의 역할은 자유시장의 틀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정부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그도 잘 대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후학인 신자유주의자들 역시 자유시장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답을 내놓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정의길 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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