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11 20:07
수정 : 2005.03.1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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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스트로이카 그후 20년
세계무대선 여전히 영웅
“숫자 11은 힘차게 출발할 준비가 된 새 시대를 여는 신호음을 울리는 드럼 채와 같다.”
역사학자 안드레이 단체프는 미하일 고르바초프(74·사진)가 소련 최고 자리에 오른 지 20년이 되는 11일을 맞아 이처럼 말했다. 20년 전인 1985년 3월11일, 소련 해체와 냉전 종식을 부른 고르바초프가 권좌에 올랐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 두 단어로 소련 해체와 냉전 종식을 불러, 결국 ‘역사의 종언’이란 주장까지 나올 만큼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고르바초프. 10일 영국 〈비비시방송〉은 85년 3월10일 콘스탄틴 체르넨코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갑자기 숨진 뒤, 정치국 최연소 위원이었던 고르바초프가 최고 자리인 서기장으로 선출되기까지 하룻동안 일어난 밀실의 알력다툼을 소개했다.
당시 대부분의 정치국 위원들은 나이가 많아 서기장 자리를 넘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체르넨코 전 서기장이 이미 고르바초프를 비공식적인 후계자로 삼은 상황이었다. 그는 정치국 원로들에게 가장 큰 적수였던 그리고리 로마노프보다 인기가 좋았다. 로마노프 세력은 영향력이 컸던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국방장관이 1984년 말에 숨진 뒤 힘이 크게 약해져 있었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 설계자’이자 절친한 조언가가 된 알렉산드르 야코블레브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85년 3월11일 고르바초프는 정치국 모임으로는 이례적으로 총회에서 한 연설을 소비에트 언론에 내보냄으로써, 그의 권력 승계를 만천하에 공표했다. 이어 그는 1990년 인민대표회의에서 소련 대통령으로 추대됐지만, 그의 개혁 정책이 계획경제와 자유경제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지 못해 위기를 맞았다. 1991년 8월에 일어난 쿠데타는 3일 만에 진압됐지만, 그해 12월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등이 독립국가연합을 결성한 것에 책임을 지고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작 러시아에서는 그와 그의 업적이 그리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 5~6일 ‘모든 러시아인 여론 조사 센터’가 전국의 러시아 국민 1600명을 대상으로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20년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61%가 페레스트로이카가 싫다고 답했다. 고르바초프가 싫다는 대답도 45%로 좋다(13%)는 응답보다 훨씬 높았다. 1985년 조사에서 고르바초프를 지지한다는 응답이 40% 가량 됐던 것과 대조적이다. 영국 〈가디언〉은 8일 “러시아에서는 그가 환영받지 못해도, 세계 무대에서 그는 여전히 영웅”이라고 추켜세웠다.
고르바초프가 의장을 맡고 있는 세계정치포럼은 4~6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1985~2005: 세계를 바꾼 20년’이란 주제로 총회를 열었다. 고르바초프는 개막연설에서 20년 전보다 지금 세상이 더 안전한 곳인지 묻는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그렇다, 많은 불안정 요소들이 있지만, 핵전쟁 위협은 피했다”고 답했다고 〈가디언〉이 전했다. 신문은 그가 대통령직을 마친 뒤에도 환경 보호와 무기산업 종말을 위해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극단의 시대〉 저자인 에릭 홉스봄은 이날 그의 업적을 두고 “페레스트로이카는 제2의 러시아 혁명을 불러오지 못한 채 1917년 혁명으로 세운 제도를 무너뜨려 사회·경제·문화적 황폐화를 불렀다”며 “러시아가 이 황폐함을 극복하는 데는 이미 세계전쟁에서 회복하는 것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리고 있다”는 혹평을 쏟아냈다.
고르바초프는 총회에서 냉전이 끝났음에도 새로운 분쟁들이 생기고 사람들이 여전히 군사화돼 있는 상황에 실망을 표시하며 “불행히도 대화를 싫어하고, 대화를 할 수 없으며, 외교를 할 수 없는 정치 지도자들이 너무 많다”고 한탄했다.
윤진 기자
mind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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