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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비아가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선언한 뒤 미국의 오랜 경제제재와 ‘테러국가’ 낙인에서 벗어나 ‘리비아식 해법’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서방국가들과 화해한 뒤 15년 만에 처음으로 유럽 방문에 나선 카다피 리비아 지도자가 유럽연합(EU) 본부 건물에 걸린 그림 앞을 지나고 있다. 브뤼셀/로이터 연합 중동 다시 깊이보기 1. 아라파트 이후의 팔레스타인
2. 석유와 내전-수단의 명담
3. 이슬람주의 마지막 불꽃, 알제리
4. 중동의 관광대국 꿈꾸는 튀니지
5. 리비아, 투항인가 변신인가
6. 모로코의 정치개혁 실험
7. 중동평화와 이집트의 선택
8. 이슬람주의 산실, 알아즈하르 대학
9. 유헙행 둘러싼 터키의 고뇌
10. 좌담
지난해 마지막날, 카이로 국제공항에서 리비아인 하산(45)을 만났다. 최근 미국과 리비아의 관계개선에 대해 묻자 그는 “결국 올 것이 왔어. 이제 리비아도 변해야 돼”라며 현 리비아 체제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옆에 있던 그의 친구 무함마드(43)는 그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미국이 리비아를 어렵게 만들었어. 하지만, 이제 정부가 더 나은 리비아를 위해 주체적으로 변화를 선택한 거야”라며 정부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들의 대화에서 드러난 것처럼 최근 리비아의 변화를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대표적 ‘반미 국가’였던 리비아가 2004년 24년 동안 단절됐던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공식적으로 회복하는 등 화해와 변신에 나서자 국제 사회에서 커다란 반향이 일었고, 이에 따라 ‘항복선언’(?)을 의미하는 ‘리비아식 해법’이 거론되고 있다. 미국은 ‘리비아식 해법’을 부시 외교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자축하면서 또 다른 반미국가 북한과 이란에게도 이 해법을 강요하고 있다. 과연 리비아식 해법이 부시 외교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인가? 또한 리비아식 해법은 리비아의 항복선언일까? 사실상 리비아의 변화는 부시 행정부 출범과 이라크 전쟁이 얻어낸 결과가 아니라 훨씬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쿠데타뒤 친미서 반미로 미국과 리비아의 관계는 불신과 대립의 역사였다. 하지만 두 나라가 처음부터 불편한 관계였던 것은 아니다. 가난한 농업국가였던 리비아는 1959년 석유가 발견되면서 부유한 석유왕국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석유 발견 이후 이드리스 왕정체제의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로 다양한 사회갈등이 나타났다. 이드리스왕의 친서방정책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국이 패배한 이후 리비아 국민들의 분노를 확산시켜 곧바로 반왕정투쟁으로 이어졌다. 1969년 무암마르 알 카다피 대령이 이끄는 육군 장교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이드리스왕을 폐위시키고 ‘리비아 사회주의 아랍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카다피는 반미노선을 채택했고 이후 미국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미국과 리비아의 관계를 악화시킨 결정적인 사건은 1986년 시작되었다. 그해 1월 미국은 리비아 경제제재 조처를 발표했고, 그해 4월 서베를린에서 발생한 폭탄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카다피의 숙소와 벵가지 주요시설을 폭격했다. 또한 1988년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팬암 여객기가 폭파돼 270명이 숨지는 대형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용의자로 두 명의 리비아인이 지목된 뒤 유엔은 리비아 제재조처를 단행하였다. 먼저 이 불편한 관계의 변화를 요구하고 나선 것은 리비아였다. 리비아는 1992년부터 비공식적으로 미국에 관계개선을 요구했으나 당시 부시 행정부와 클린턴 행정부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당시 리비아는 대량살상무기(WMD) 포기와 테러행위 중단에 대한 조건으로 경제제재 해제와 관계 정상화 협상을 제안했다. 1999년 중반부터 클린턴 행정부는 마침내 리비아와의 비밀협상을 시작했고 주요 이슈는 팬암 103호기 폭발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리비아는 다른 다양한 주제에 관해서도 협상하자고 요구했지만 클린턴 행정부는 거부했다. 미국은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이 아직 초기단계여서 긴급한 위협요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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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11 동시테러 이후 리비아는 미국의 정보기관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면서 미국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했다. 카다피는 이미 1990년부터 국내에서 급진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위협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와 대중민주주의를 주장하며 이슬람 성직자들의 권력을 축소하려는 카다피의 정책에 반발한 보수적 성직자들은 사원을 중심으로 반 카다피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오랜 경제제재로 피폐해진 경제 속에서 정부에 대한 반감을 키워가던 많은 국민들이 이에 기울었다. 이슬람해방당, 민족해방전선 등 급진적 이슬람단체들이 카다피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을 본격적으로 시도하자, 카다피는 내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에 이슬람테러조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미국과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또한 리비아는 팬암기 피해 유족 대표 변호사와 보상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했다. 카다피, 1992년부터 대미 관계개선 시도
국내 급진 이슬람단체 반발 제동 목적도
팬암기 보상-무기포기-관계복원 길밟아 하지만 같은 시기에 부시 행정부는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위협을 과장하면서 국제사회에서 리비아 문제를 언급하고 나섰다. 2002~2003년 존 볼튼 미 국무부 군축·국제안보 담당 차관은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 개발문제를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이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2002년 5월 팬암기 피해 유족 대표 변호사는 리비아와 보상협상에 합의했고, 보상금액은 2003년 9월 27억달러(유가족당 1천만달러)로 최종 합의됐다. 영국은 이보다 앞선 2003년 3월 리비아와 양자협상을 통해 관계개선을 추진했다. 2003년 12월 마침내 리비아는 미국, 영국과의 비밀협상을 바탕으로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포기를 선언하게 되었다. 미·영과 대량무기 물밑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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