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2.08 19:57
수정 : 2007.02.0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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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각지에서 온 자선단체 근무자들이 파운데이션센터에서 모금 및 기금분배 등에 관한 교육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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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가 본 세계현장 ④ 나눔의 문화 확산되는 미국
영하 15도 안팎의 한파가 몰아닥친 지난달 20일 오후 뉴욕 파크애비뉴에 있는 북유럽풍 건물 5층 ‘하임볼트 가족어린이 학습센터’. 바이킹 복장 어린이 7~8명이 한켠에서 레고게임을 하고 있었다. 다른 그룹은 책을 읽고 있었다. 곁에선 엄마 아빠들이 연신 ‘베리 굿!’ ‘원더풀!’ ‘엑설런트!’ 하면서 자녀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곳은 세계적인 자동차회사 크라이슬러의 뉴욕빌딩이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미국 스칸디나비아재단.
이 재단은 애초 1910년 덴마크 기업가 폴센이 주축이 돼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 덴마크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로부터 출연받아 세워졌다. 2000년 이곳으로 확장·이전해 갤러리, 도서관, 카페, 뮤직홀 등을 갖추고 미국 안 이들 5개국 출신자들의 교육 및 문화교류에 이바지하고 있다. 재단은 설립 당시부터 철저하게 기부와 자체사업 수익에 의존해 운영되고 있다. 재단의 린 카터 사무부총장은 “작년 예산 500만달러 가운데 기부금으로 100만달러를 충당했다” “적게는 1달러에서 수십만달러에 이르는 기부자 명단은 건물 입구 현관과 홈페이지 등을 통해 매년 공개해 기념한다”고 말했다.
재단 지하 1층엔 뮤직홀이 있다. 2000년 10월 개관한 이 홀은 최고액(100만달러)을 기부한 덴마크 출신 유명 피아니스트 겸 개그맨 빅터 보르게를 기념해 ‘빅터 보르게홀’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해 12월 91살을 일기로 숨진 그는 평소 “후배 음악인들이 마음 놓고 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다”며 100만달러를 쾌척했다. 가로 14열, 세로 12열 등 168개 좌석 중 앞에서 4번째 맨왼쪽 것은 붉은 색이다. 나머진 모두 푸른 색. 좌석 등받이엔 기부자 이름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보르게가 가운데 대신 귀퉁이쪽을 선택한 것은 나이가 너무 많아 화장실 가기 쉬운 자리’를 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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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오른쪽)와 부인 멜린다가 아프리카에서 구호활동을 벌이던 중 흑인 영아들을 돌보고 있다. / 스칸디나비아센터 5층 하임볼트 가족어린이학습센터에서 어린이들이 부모 및 교사들과 놀이를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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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사무부총장은 “기부는 ‘가장 명예로운 일’이라는 것을 이곳에 오는 모든 이에게 알리고 있다”며 “작년 한해 재단을 찾은 5만명이 어떤 생각을 갖고 돌아갔는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잘 알 것”이라고 말했다.
기부가 생활의 중요한 일부로 자리잡은 미국사회에서 2006년은 ‘기부문화에서 한 획을 그은 해’로 기억될 것이라고들 한다.
자신의 재산 대부분인 310억달러를 내놓은 워런 버핏에 이어 시티그룹 샌디 웨일 전 회장도 14억달러를 자선단체에 기부할 뜻을 밝혔다. 기부행렬은 새해 벽두부터 계속 확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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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민간부문 기부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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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폴슨(60) 재무장관이 8억달러를 2008년 미국 대선 이후 현직을 떠날 때 환경단체에 기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작년에도 골드만삭스 주식 중 1억달러 어치를 환경보존 단체에 기부했다.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으로 세계 최고부자인 빌 게이츠는 기업인이라기보다 자선사업가로 더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고 미국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가 부인 멜린다 게이츠와 세운 ‘빌&멜린다게이츠재단’의 현재 기금은 320억달러(약 30조원)에 이른다. 그의 재단은 아프리카의 에이즈·말라리아·결핵 퇴치에 앞장서 70만명 이상의 생명을 구했다. 이들 부부는 특히 과학적이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자선사업을 펼치며 기부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올 초 한화 400억원을 들여 남아공에 여성인재학교를 세운 미국 최고의 앵커우먼 오프라 윈프리 역시 전세계에 감동을 전하고 있다.
30년 가까이 대기업에서 일하며 중역으로 퇴직한 뒤 최근 ‘뉴욕아름다운재단’ 협동이사로 자리를 옮긴 박중섭(51)씨는 “미국은 요즘 ‘존경받는 훌륭한 부자 되기’ 열풍이 부는 듯한 분위기”라며 “워런 버핏,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오프리 윈프리 등의 기부 및 자선사례가 일반인들 기부문화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했다. 그는 “생전 고약한 기업가로 비난받던 카네기나 록펠러 같은 이들이 자선재단을 설립해 기부에 앞장섬으로써 사후 존경을 받는 것은 미국에선 아주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미국 명문 프린스턴대이사회는 1월21일 2007~08학년도 등록금을 동결한다고 발표했다. 캐스 클라이엇 대변인은 “지난해 6월 기준으로 130억달러의 사상 최대 기부금 수익을 올려 이렇게 결정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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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상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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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 5번가에 위치한 파운데이션센터에선 미국 안의 재단에 관한 자료를 한눈에 찾을 수 있다. 센터는 100권 이상의 저널, 2만3천개의 비디오·오디오테이프 그리고 관련 서적을 확보하고 있다. 1956년 설립한 이 센터는 2006년 말 현재 5100억달러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 내 6만8천여 재단에 관한 모든 정보를 관리하고 있다. 컬럼비아대에서 평생교육학을 전공한 뒤 뉴욕시립대 등의 강단에 서다 2000년 센터에 합류해 교육서비스 부문 부센터장으로 일하는 최주원(48)씨는 “미국인들 10명 가운데 7명 이상은 기부를 하나의 생활습관으로 하고 있다”며 “그들의 기부행위는 경기 흐름에 그다지 영향받지 않고 꾸준히 이뤄진다”고 말했다. 최씨는 “클린턴이나 카터 같은 전직 대통령이 퇴임 뒤 자선활동을 하는 게 무척 부럽다”며 “한국도 그럴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12월 대통령선거에 나오는 후보들의 기부활동 여부를 언론에서 검증하면 어떨까요? 많은 액수를 단번에 기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액이라도 오랜 동안 꾸준히 기부하는 문화가 한국에서도 자리잡을 때가 된 것 같아요. 지도층으로 존경받으려면 자신의 것을 남과 나누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의 말이 가슴을 울렸다.
뉴욕/이상기 지역 편집장
사라 엥겔하트 파운데이션센터 회장“파워그룹, 사회개선에 자선사업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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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엥겔하트 파운데이션센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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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파운데이션센터 사라 엥겔하트 회장은 “기부는 본질적으로 사회변혁 운동의 하나”라며 “기부자들은 자신이 속한 세상이 꾸준히 발전하기를 꿈꾸고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엥겔하트 회장은 지난해 워런 버핏이 전 재산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310억달러를 빌&멜린다게이츠재단에 기부하기로 약속한 것에 대해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은 자선사업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자신들이 소유한 부를 결합하면서 자선사업의 새 기준을 세웠다”며 “많은 이들이 그들을 모델 삼아 기부행위를 확대해 나가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빌 게이츠, 테드 터너, 조지 소로스, 마이클 블룸버그 등 성공한 유명 사업가가 최근 자선사업가로 대거 떠오르는 것은 과거 카네기나 록펠러처럼 21세기 기부문화 확산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흥미로운 것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경우”라며 “클린턴은 자신이 번 돈으로 기부하는 게 아니라 평소 쌓아온 인맥을 이용해 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엥겔하트 회장은 “클린턴을 포함한 이들 대규모 기부자들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공통의 비전을 지닌, 경제적·정치적 파워그룹”이라며 “정치적 영향력과 자선사업 욕구가 결합하는 것은 일종의 ‘환상적인 결합’과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현상에 대해 “정부와 정치가 정체된 상태에서 온 결과일 수도 있다”며 “정치에 염증을 느낀 파워그룹은 사회를 계속 개선하기 위해 자선사업을 이용하고 있으며, 이는 분명히 주시해야 할 상황”이라고 말했다.
엥겔하트 회장은 “글로벌 시대에 살면서 직면하는 건강·환경·이민·노동 문제 등에는 국경이 없다”며 “세계화는 앞으로도 계속해 기부문화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명문 웰즐리대 졸업 후 컬럼비아대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1984년 센터 운영이사회에 발을 디딘 이래 1987년 파운데이션센터 부회장을 지냈다. 파운데이션센터에 합류하기 전엔 뉴욕카네기재단 스텝으로 20년 넘게 일했다.
뉴욕/이상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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