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4.24 01:38
수정 : 2007.04.26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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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19일,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 강경보수파가 쿠데타에 동원한 탱크 위에 올라서서 시민들에게 저항을 호소하고 있다. 모스크바/AP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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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쿠데타 막아내며 러시아 ‘영웅’으로
경제파탄·체첸 유혈진압 등 통치는 낙제점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연방 대통령은 소련 붕괴와 냉전 종식이라는 세계사적 격변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주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과 함께 새로운 세계질서가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옐친은 무엇보다 20세기 냉전체제의 한 축인 소련의 ‘숨통’을 끊은 인물이다. 1990년 5월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소련의) 15개 공화국의 평등 및 독립을 지지한다”고 선언해, 1917년 볼셰비키 혁명에 이어 22년 출범한 소비에트연방에 ‘사망 선고’를 내린다. 급진개혁과 반부패가 그의 슬로건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1934년 ‘반체제 선동’죄로 3년을 복역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아들이 소련 체제를 종식시켰다는 점도 흥미롭다.
옐친한테 날개를 달아준 것은 역설적으로 그의 정적들이다. 소련 해체에 반발하는 강경 보수파는 1991년 8월 수도 모스크바에서 쿠데타를 일으켰고, 옐친은 쿠데타군의 탱크에 올라서서 ‘민주주의’를 지키자고 시민들한테 호소해 60시간 만에 쿠데타 세력을 좌초시켰다. 이 사건으로 ‘개혁 동지’였던 고르바초프는 뒤로 밀리고, 옐친은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옐친은 그 해 12월 발트 3국과 그루지야를 제외하고 독립국가연합(CIS)을 창설하면서 소련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이런 주도권을 바탕으로 1999년 12월31일 사임할 때까지 최고권력자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현 대통령은 당시 그가 총리로 낙점한 인물이다.
그가 러시아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확립했다며 칭송하는 이들도 있다. 에듀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전 그루지야 대통령(전 소련 외무장관)은 옐친의 사망 소식에 “옐친은 개혁가이자 민주주의자였다”고 말했고, 푸틴 대통령은 옐친의 부인 나이나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했다.
그러나 재임 기간에 그의 행적은 쿠데타 기도를 꺾었을 때의 카리스마적 이미지를 갉아먹고도 남는 것이었다. 급격한 체제 와해와 자본주의 체제로의 이행은 1990년대에 러시아 경제의 생산력을 소련 붕괴 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재앙을 불렀다. 국유재산은 권력과 결탁한 과두재벌(올리가르히)들한테 헐값에 불하됐다. 부패와 정치 불안은 러시아 사회를 무법상태로 몰고갔고, 러시아인들의 불만도 커져갔다. 지난해 한 여론조사에서는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함께 러시아혁명 이후 가장 실패한 지도자로 꼽혔고, 지지도는 2%에 그쳤다. 체첸 독립운동 세력을 진압하는 전쟁을 벌인 것도 막대한 인명살상과 치안 불안을 불러오고,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의 이미지를 크게 떨어뜨린 일로 꼽힌다.
옐친은 또 알코올에 강한 의존성을 보이며 정상외교 현장에서도 실수를 범하는 등 기행을 일삼아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대외정책에서는 지나치게 미국을 추종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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