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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방콕에 있는 한 제약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에이즈 치료제를 생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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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 제약사들 아시아 등에 잇단 임상센터
남아프리카공화국 수도 케이프타운 밖의 빈민지역에는 다국적 제약회사인 베링거잉겔하임의 연구소가 있다. 인도 뭄바이 빈민가에도 순백색의 노바티스 건물이 우뚝 서 있다. 경쟁사인 화이자와 글락소스미스클라인, 아스트라제네카 등도 최근 인도에 대규모 임상실험센터를 세웠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이 빈털터리 환자의 병을 낫게 해주려는 것일까? 임상 위험성 제대로 안알려
참여자들 불임 부작용 사태도
약효 입증땐 혜택은 선진국서 사실 약품을 소비하는 나라의 대부분은 선진국이다. 미국은 한해 1인당 10건의 처방전을 사용하는 세계에서 제일 큰 의약품 시장으로, 의약품 소비 역시 연간 15%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미국에서 각종 의약품에 관한 규제조처도 기업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1992년에는 신약 승인요청 소요시간이 줄어들었고, 97년에는 텔레비전의 신약 광고가 허용됐다. 하나의 약품이 시판되려면 적어도 환자 4천명 이상에 대한 실험과, 일반인 10만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예비실험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신약 실험에 참여하고자 하는 미국인은 전체의 5%에도 미치지 못한다. 또 완벽한 결과를 위해서는 의약품에 노출되지 않은 환자군과, 질병이 있으면서도 의약품이 투여되지 않는 대조군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사람을 미국에서 찾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나 개발도상국에는 이런 환자들이 넘친다. 이런 점에 착안해 외국에서 임상실험을 하는 퀸틸, 코벤스, 찰스리버랩스 등의 ‘계약 연구기관’들이 성행리에 사업을 하고 있다. 이 가운데 퀸틸 한 곳만 칠레, 멕시코, 브라질,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남아공, 인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타이 등 12개국에서 임상실험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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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위험한 임상실험을 진행하는 다국적 제약 기업의 음모를 다룬 영화 ‘콘스탄트 가드너’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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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돈을 내고 치료받을 길이 없는 개발도상국의 환자가 치료도 받고, 의학 연구에 기여도 한다면 모두에게 득이 되는 일이 아니냐고 여길 수도 있다. ‘공장도 개발도상국으로 옮기는 판에 임상실험이라고 이동하지 말라는 법이 있냐’는 논리가 이를 대변한다. 그러나 공장과 임상 실험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실험 참여자가 실험 때문에 건강해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임상실험의 절대적 전제 조건은 ‘인간에 대한 윤리성 확보’여야 한다. 세계의학협회의 헬싱키선언 등은 실험 대상자들이 위험에 대해 제대로 설명을 듣고 자원했느냐를 그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생명윤리학자들은 임상실험에서 동의가 얼마나 제대로 이뤄졌냐의 판단 근거로 실험대상자의 지원포기율을 참고한다. 서구 세계의 지원포기율은 종종 40%를 넘어선다. 반면 인도에서는 99.5%가 임상 실험에 그대로 참여한다. 남아프리카의 한 병원에서는 실험 지원을 포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원자의 80%가 모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엽기적인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놀랍지 않다. 인도에서 일어난 사건 몇 건만 보자. 1970년대에는 무허가 말라리아 예방약인 퀴나클린이 수십만명의 문맹 여성들을 영구 불임으로 만들었다. 2001년에는 케랄라에서 실험용 항암제가 동물에게서의 무해성이 입증되기 전부터 임신을 원하는 여성 400명 이상에게 투여됐다. 가임에는 치명적인 제품이었다. 국제 사회는 제약 실험에 대한 최소한의 법적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일단 인간을 생쥐 취급하는 몇몇 실험은 종결돼야 한다. 그리고 의약품 실험에 참가한 대상자들이 약의 효능을 입증했을 경우, 최소한 그 나라에서는 약을 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제약회사들은 종종 성공적인 신약 실험을 수행한 나라에 판매권을 주지 않거나, 그 나라에서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비싼 값을 매긴다. 소니아 샤하/캐나다 기자, <신체 사냥꾼, 최빈국 환자에게 행해지는 신약 실험>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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