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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27 19:23 수정 : 2005.03.27 19:23


△ (사진설명)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야당과 시민단체 및 미국 등 국제사회의 정치개혁 압력에 밀려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다고 천명한 데 이어 지난 9일 이집트 의회가 복수후보가 출마하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한 뒤 자축하고 있다. 카이로/AP 연합/font>

중동 다시 깊이보기

1. 아라파트 이후의 팔레스타인
2. 석유와 내전-수단의 명담
3. 이슬람주의 마지막 불꽃, 알제리
4. 중동의 관광대국 꿈꾸는 튀니지
5. 리비아, 투항인가 변신인가
6. 모로코의 정치개혁 실험
7. 중동평화와 이집트의 선택
8. 이슬람주의 산실, 알아즈하르 대학
9. 유헙행 둘러싼 터키의 고뇌

10. 좌담

독재청산땐 지도국가 재부상 가능성
아들 후계자 등장 요식행위 가능성도
대통령 ‘행차’ 풍경 한국 과거와 닮아

지난 1월 중순 이집트 남부 수에즈를 찾았던 날은 때마침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현지 방문이 예정돼 있었다. 수에즈 시내 전역은 10m 간격으로 경찰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고, 대통령이 이동하기로 예정돼 있는 길가마다 동원된 학생들로 가득차 있었다. 어린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이집트 국기를 손에 들고 있었고, 곳곳에서 대통령을 환영하는 펼침막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모두가 쌀쌀한 겨울날씨에 떨면서 언제 지나갈지도 모르는 대통령을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웅크리고 서 있는 남녀학생들의 모습은 우리와는 달랐지만, 불과 20~30년 전 우리 과거를 보는 것 같아 착잡했다.

이집트는 중세와 현대가 공존하고 있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도 엄청나지만 카이로 시내에서도 중세와 현대가 교차하고 빈부의 격차가 너무 커 보인다. 교민과 유학생들은 최근 외곽 고속도로가 건설됐고 최고급 호텔을 비롯한 초고층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고 자랑하듯 얘기했지만 7년만에 다시 가본 카이로는 특유의 건물색깔 때문인지 천년 전에 지어진 모스크들과는 다른 차이나 변화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공공기관 건물에 대한 위압적 경비와 ‘호텔’ 간판을 단 변변찮은 건물들에서도 엄격한 검색이 이뤄질 정도로 외국인 관광객에 대한 무장요원들의 보호가 한층 더 삼엄해진 것만은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낫세르 정권땐 혁명철학 수출

1952년 파루크 왕정체제가 낫세르가 주도하는 자유장교단의 쿠데타로 무너진 뒤 사다트 정권과 현 무바라크 정권에 이르기까지 이집트는 권위주의적 독재체제가 이어지고 있다. 군사혁명의 첫 주자인 낫세르는 이집트를 아랍세계의 중심국가로 만든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였다. 그는 미-소 냉전체제에서 비동맹 외교정책을 주창하면서 아랍세계는 물론 제3세계의 지도자로 올라섰다. 낫세르는 공화정 체제로 아랍세계를 통일하려 했다. 이를 위해 그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보수왕정 국가들에 자신의 혁명철학을 수출하기 시작함으로써 아랍세계에서도 냉전체제가 시작됐다.

대표적 아랍민족주의자였던 낫세르는 이스라엘과 보수 아랍왕정국가들을 지원하고 있는 서방세계에 대항하기 위한 생존전략으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권과의 외교관계 강화를 통해 아랍민족의 독립성을 확보하려 했다. 무엇보다 그는 1956년과 67년 두 차례 중동전쟁을 주도했고, 특히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조직하고 지원함으로써 이집트가 팔레스타인의 보호자적 위상을 확보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두번째 주자인 사다트는 낫세르와는 다른 길을 갔다. 그는 황폐한 이집트 경제를 살리기 위한 방안으로 친미 외교정책과 이스라엘과의 평화 모색을 선택했다. 사다트는 낫세르가 대의적 관점에서 접근한 아랍민족주의를 거부하고, 이집트 국익을 우선시하는 ‘이집트주의’를 표방했다. 이런 그의 정책노선은 미국 주도 아래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맺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서 잘 드러난다. 사다트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소외시킨 가운데 팔레스타인 문제를 뒤로 미루고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던 시나이 반도의 반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를 축으로 한 중동평화회담에 합의했다. 그 대가로 사다트는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이 배제된 반쪽짜리 중동평화회담을 성사시킨 사다트의 실리외교는 이집트가 아랍연맹과 이슬람회의로부터 추방되면서, 아랍세계에서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정치·경제·군사적 후원자인 이집트를 잃게 됐고, 아랍국가들 사이의 분열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민족과 종교적 연대감을 경제적 실리로 대체하려던 사다트는 그가 옹호했던 이슬람주의자들 손에 암살당했다.

무바라크 시대는 국제정치와 지역정치에서 급격한 정치변동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국제정치 차원에서 볼 때, 1990년대 초부터 동유럽과 소련이 무너지고 미국의 독주가 시작됐다. 지역정치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87년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시작된 팔레스타인 민중봉기 (인티파다)로 1천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군 손에 희생당했다. 이스라엘의 과잉진압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게 됐고,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인티파다 주도세력이었던 무슬림형제단의 아메드 야신이 주도하는 하마스가 주도적 강경세력으로 등장하는 대신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지도력은 상대적으로 약화하는 중요한 분기점을 맞이하게 됐다. 이런 상황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식적으로 첫 대면했던 회담인 마드리드 회담, 땅과 평화의 교환이었던 오슬로 회담을 성사시키는 계기가 됐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탄생으로 이어졌다.

민주화 흐름속 역내위상 위축

1990년 이후 중동평화 바람과 함께 민주화 열풍이 불면서 비민주적 독재체제와 절대왕정 체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여론도 더욱 강해졌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이유로 국내에서 억압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권위주의 정권은 나라 안팎에서 저항에 부딪치게 됐다. 이에 따라 독재나 절대왕정 체제인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는 지역내 위상이 점차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면서 역내 정치무대에서 예전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됐다. 이런 경향은 아라파트한테서도 나타났다. 그 역시 부패와 권력독점으로 팔레스타인 지지세력에 대한 영향력이 약해졌고, 미국과 이스라엘로부터도 협상 파트너로 인정받지 못하게 됐다.

지금 아랍세계에서도 변화가 소리없이 다가오고 있다. 그 시작은 아라파트 사후 팔레스타인에서 이미 시작됐다. 하마스나 이슬람지하드가 참여하진 않았지만 민주선거를 통해 마무드 아바스가 새 수반으로 선출됐다. 오는 7월에는 자치의회 선거가 있다. 이 선거에는 하마스와 이슬람지하드의 참여도 예상되는데, 이를 통해 팔레스타인 민주화의 폭과 강도는 더욱 넓어지고 강해질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민주선거는 투쟁 일변도인 무장세력을 선거에 참여시키는 것은 물론 제도권으로 흡수시킴으로써 중동평화 기반을 확대시킬 수 있다.

9월, 파라오 이후 첫 민주선거

이집트는 이제 중동평화에서 시작된 민주화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두 가지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다. 무바라크 대통령이 공언한대로 민주적 절차에 따른 자유로운 경선을 통해 대통령을 선출할 것이냐, 아니면 그의 아들 가말 무바라크에게 정권을 물려주기 위한 요식행위에 그칠 것인가이다. 카이로에서 만난 이집트인들은 대체로 무바라크 대통령의 지도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의 장기집권까지도 눈감아주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후계자로 등장하는 것에 대해선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가 추진하고 있는 개헌이 귄위주의 독재정권을 청산하는 계기가 된다면 이집트는 아랍세계의 지도국가로 재등장할 수 있는 획기적 기회를 잡는 것이다. 그러나 무바라크 대통령이 반대를 무시하고 자신의 5차 연임 또는 권력세습을 위한 요식행위로 개헌을 추진한다면 이집트는 정치불안에 휩싸일 것이고, 중동평화를 위협하는 국가로 전락할 것이다. 야당 지도자 무하마드 울완은 이번 선거를 “파라오 이후 처음으로 이집트인들이 그들의 통치자를 뽑는 역사적 순간”이라고 강조했다.

박종평 교수/한국외대 아랍어과


50년 독재끝 민주화 숨통, 야당약세·빈곤 곳곳 암초


▲ 지난달 21일 이집트 카이로대학 앞에서 500여명의 시위대가 3천여명의 경찰이 주시하는 가운데 ‘이제 충분하다’고 쓴 깃발을 들고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5선 연임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카이로/AP 연합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복수 후보 출마와 직접·비밀투표 등을 뼈대로 하는 대통령 선거제도 도입을 위한 헌법 개정을 의회에 요구하고 나서 세계가 놀라고 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수도 카이로의 모노피아대학에서 한 연설에서 “대통령은 모든 정당들이 참여하는 복수 입후보자에 대한 직접·비밀투표로 선출될 것”이라고 밝히고, 이에 필요한 헌법개정을 의회에 요구했다. 이집트에서 직접 경선을 통해 대통령이 선출되면, 이는 1952년 ‘낫세르 혁명’ 이후 계속돼 온 50년 군부독재에 마침표를 찍고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중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민주화 바람은 아랍세계에서 이미 시작됐다. 지난해 숨진 야세르 아라파트의 뒤를 이어 올해 초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후임 수반으로 마무드 아바스가 자유선거를 통해 당선됐고, 불안전한 치안상황 아래서도 이라크에서 60% 가량의 유권자가 참여한 가운데 선거가 치러졌다. 또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사상 첫 지방선거가 실시된 바 있다. 이처럼 보수왕정체제와 권위주의적 독재체제의 대표지역으로 간주돼온 아랍세계에도 민주화를 향한 선거 훈풍이 불고 있다.

이런 변화의 원인은 크게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외부적 요인으로 미국의 압력을 들 수 있으며, 또 다른 하나는 내부적 요인으로 <알자지라> 등 아랍 위성방송의 영향을 들 수 있다.

9·11 동시테러 이후 미국은 아랍세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등장한 요인의 하나로 전근대적 독제체제를 지목하고, 아랍권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를 압박해 왔다. 미국의 민주화 압력은 무바라크 대통령의 대통령 직선제 수용에도 절대적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지난 1월 이집트 경찰이 야당 지도자 아이만 누르를 체포하자, 이에 대한 항의로 3월로 예정됐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이집트 방문을 전격 취소하면서 무바라크 대통령을 압박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집트를 중동평화의 중재자로 올려 세운 후원국이며 연간 20억달러를 원조해 주고 있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알자지라>의 역할도 크다. 1996년 설립된 <알자지라>는 아랍의 시각으로 아랍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아랍인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다. 특히 이 방송은 미국의 중동정책과 이에 동조하는 아랍정권을 비판함으로써 서구와 일부 아랍 권위주의 독재정권과 갈등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알자지라>는 언론통제와 정보부족으로 소외된 아랍 대중들에게 진실을 전달함으로써, 독재에 저항하는 힘을 모으는 역할을 했고 아랍세계에서도 민주화 담론이 형성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집트의 민주화 바람이 민주적 제도로 정착될지는 속단할 수 없다. 야당세력의 약세, 경제적 빈곤, 정치와 종교의 불분명한 경계, 그리고 중산층의 허약성 등이 민주화의 장애 요소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과 이라크에서 시작된 아랍세계의 민주화 바람은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세계에 계속 변혁을 요구하는 불씨가 될 것이다.

박종평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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