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27 21:05
수정 : 2005.03.27 21:05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불평등을 완화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예전엔 학자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다. 즉 민주정부는 권위주의 정부보다 서민들의 이해를 좀더 중시할 것이므로 경제적 불평등이 완화된다는 것이다. 보수적 학자들은 민주주의가 부자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을 걱정할 정도니, 민주주의가 불평등을 감소시킨다는 기대는 당연했다. 이런 생각을 반영한 것인지 모르지만, 민주정부 이후 평등주의와 분배주의가 확산되어 한국경제의 성장이 둔화됐다는 주장이 급진적 시장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자주 제기되고 있다.
민주주의와 소득분배에 관한 예전의 실증연구들은 대부분 민주주의가 소득분배를 개선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의 세계 각국 자료를 포함시켜 분석한 최근의 실증연구들을 보면 민주주의가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했다는 증거는 매우 취약하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민주화된 동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불평등이 악화되었다.
우리나라도 1993년 문민정부 때부터 지니계수가 조금씩 악화되기 시작했고,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다음에는 외환위기의 여파로 소득불평등이 극도로 심화되었다. 참여정부에서도 악화된 지니계수는 별로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민주정부 이후 불평등이 심화된 것을 고려하면 민주정부의 평등주의 정책 때문에 성장이 둔화됐다는 주장에 동의하기 힘들다.
확산된 것은 평등주의와 분배주의가 아니라 주주자본주의와 노동시장 유연화 같은 신자유주의이다. 민주주의는 왔지만, 보통사람들의 소박한 기대와는 달리 불평등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가라는 회의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민주주의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먼저 “세계화 시대에는 성장을 위해 불평등을 감수해야 한다”는 근거없는 망령에서 벗어나야 한다. 유럽의 강소국들처럼 경제개방과 세계화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타면서도 공평한 분배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
분배가 성장을 저해한다는 주장은 분배가 저축률을 떨어뜨리고 투자율도 낮춘다는 고전파 경제학에 근거한 것이다. 물적 자본축적이 중요했던 시절에는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계은행 등의 자료를 활용한 최근의 실증연구들을 보면 오히려 불평등이 경제성장을 저해한다는 논문이 다수다. 현대경제에서는 인적자원이 점점 중요해지며, 사회안정도 투자와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 변수다. 불평등이 심하면 저소득층 자녀에 대한 교육투자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며, 결국 그 나라가 보유한 인적자원의 잠재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게 되어 장기 성장이 둔화된다. 더욱이 불평등이 야기하는 분배갈등과 사회불안은 불확실성을 높이기 때문에 저축과 장기 투자를 저해하고 단기주의와 투기를 범람시켜 성장이 둔화된다.
절차민주주의만으로는 소득분배가 개선되기 어렵다. 서구 역사를 봐도 서민대중이 정치적으로 조직화하고 진보 의제가 의회에서 논의되고 정책으로 집행되면서 불평등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우선 현대경제학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분배와 성장의 조화를 이루는 구체적 정책을 개발해 의제로 제시하고 국민을 설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조영철/국회 산업예산 분석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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