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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0.06 12:52 수정 : 2007.10.06 12:52

볼리비아의 아이들이 체게바라 동상 앞에서 놀고 있다. 연합

남미대륙의 대표적 아이콘으로 꼽히는 체 게바라의 40주기를 맞아 그에 대한 추모와 찬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가운데 게바라를 둘러싼 각종 이야기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사실은 전혀 딴판이었다는 주장들이 나와 주목된다.

게바라의 혁명동지인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과거 "(적들의 포위망에 걸린) 게바라가 갖고 있던 무기가 마침 고장나지 않았다면 그가 결코 포로로 잡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40년 전 70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게바라를 생포했던 가리 프라도 퇴역장군은 4일 AP통신과의 회견에서 게바라는 정글에서 혼자 고립되어 있다가 "쏘지 마라. 내가 바로 '체'다"라며 순순히 투항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게바라는 거지같은 누더기 옷에 몹시 허기져 있는 데다 몸이 아파 어느 구석에서도 혁명 영웅의 면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프라도는 기억하고 있다.

프라도 장군은 게바라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4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전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을 의아해 하면서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이 게바라를 기리는 기념식에는 참석하겠다면서도 정작 좌익게릴라들을 막기 위해 목숨을 잃은 볼리비아 국군 55명을 외면하는 것에 분노했다.

프라도 장군은 "게바라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공포감을 일으킬만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동정을 받아야 할 인물이었다"고 폄하했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스페인 작가 이그나시오 라모네트에게 구술하는 가운데 "게바라는 부상을 당하고 무기도 없는 상황에서 붙잡혀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 라 이게라로 이송됐으며 다음날인 1967년 10월9일 정오에 처형됐다"며 게바라의 최후를 미화했다.

프라도 장군은 이어 게바라에 대한 처형 명령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재판을 할 경우에는 게바라의 혁명에 관한 주장이 널리 유포될 수도 있다는 염려에서 당시의 볼리비아 대통령이 내린 것이라고 증언했다.


프라도 장군 이외에 게바라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냉소적이었으며 자신은 물론 남에게도 완벽함을 요구하는 아주 복잡한 성격을 지닌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게바라의 남미대륙 종단을 다룬 영화 '모터사이클 일기'(2004년 작)에도 등장하는 여행의 동반자로 아바나에 생존해 있는 알베르코 그라나도스는 "그는 항상 자신이 말한 것을 실천에 옮겼다"고 회고하면서 "과거 사건들이 오늘날까지 전혀 옛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959년 쿠바혁명으로 쫓겨나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인사들은 게바라가 혁명 직후 과거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에서 군경 및 공무원으로 근무한 사람들에 대한 군사재판과 함께 사형까지 관할했다고 증언하면서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게바라가 쿠바 산업장관으로 일할 당시 비서를 지낸 티르소 사엔스는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으며 자신이 모범이 되려고 노력했다"고 회고하고 한번은 식량부족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풍성한 스테이크가 나오자 크게 화를 내면서 당장 치울 것을 명령했다고 증언했다.

(멕시코시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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