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4.17 20:24
수정 : 2005.04.17 20:24
특정 현안에 대한 미국 내의 여론이 궁금하다면 대표적인 일간지들을 보면 된다. 보수적인 견해는 〈월스트리트저널〉을, 진보적인 목소리는 〈뉴욕타임스〉를 통해 청취할 수 있다. 좀더 호흡이 긴 분석적 논의는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 〈네이션〉이 눈에 띈다. 이들은 주요 세계경제 현안에 대해 논리 대결을 펼치는 맞수인데, 며칠 전에는 ‘월마트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논쟁의 주제였다. 왜 월마트가 문제가 되었을까? 할인양판사업에 주력하는 소매유통기업인 월마트는 매출액 기준으로 세계 최대의 기업 중 하나다. 매출 규모보다 더 중요한 건, 이 기업이 ‘소비자 주권’의 이념을 극단적인 비용절감을 통해 구현하는 새로운 경영모델을 미국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월마트의 경영방식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갈린다. 물건값을 획기적으로 낮춤으로써 소비자들의 생활수준을 크게 개선시킨 ‘새로운 시대정신의 구현자’라는 찬사가 한쪽에 있다. 특히 〈이코노미스트〉는 월마트가 자본주의의 원동력인 경쟁을 주도한다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 뼈를 깎는 비용절감에 기초해 끊임없이 시장을 확대하는 월마트의 공격 경영은 유통업계 전반의 효율성을 높이고, 결국 그 열매는 가격인하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자와 납품업자에게 돌아갈 몫을 가로채는 방식으로 공정한 경쟁 질서를 깨뜨려 결국 지역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약탈자’라는 평가가 있다. 월마트는 지난해 샌프란시스코 연방법원으로부터 급여, 승진, 직무훈련 등에서 여성 노동자를 차별했다는 판결을 받았고, 시카고와 뉴욕에서는 지역 공동체와 노조를 중심으로 월마트의 진출을 막으려는 움직임이 진행중이다.
〈네이션〉은 월마트가 중산층을 붕괴시키고 노동자의 빈곤을 영속화시킨다는 점에 주목한다. 저임금·저비용 방식으로 낮은 가격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중산층인 노동자와 자영업자들이 몰락하고, 소득이 크게 준 이들은 신분 상승의 주요 통로인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월마트와 같은 저가형 유통업체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네이션〉은 구매력이 크게 감소한 다수의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노동억압적인 기업을 더 필요로 하게 되고,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경제사회적 위상은 더 추락하며 기업만이 살찌는 악순환 구조야말로 최근 미국경제에서 확산되고 있는 ‘월마트 모델’(Wal-Martization)의 본질이라고 해석한다.
월마트 모델은 노동자에게 높은 임금을 제공해 이들이 자동차의 새로운 수요 주체가 되도록 함으로써 노동자와 기업이 상생하는 선순환 구조 속에서 전후 미국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포드 모델’(Fordism)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현재 미국 사회에는 월마트 모델의 ‘나쁜 균형’이 포드 모델의 ‘좋은 균형’을 대체하는 강력한 힘이 작동하고 있다. 고삐 풀린 경쟁의 폭력을 사회 전반에 강요하는 월마트 모델의 시장 근본주의를 미국의 시민사회가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한다면, 누구든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미국의 꿈’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뉴욕시 의회가 월마트의 진출을 사실상 봉쇄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고는 있지만, 시민사회와 월마트의 본격적인 대결은 이제 시작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박종현/국회도서관 금융담당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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