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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21 11:26 수정 : 2005.06.21 11:26

아시아 최대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의 정신적 지도자로 21일 선종한 하메이 신 추기경은 적극적인 현실 참여로 '도덕적 나침반', '민주주의의 수호자' 등으로 불려왔다.

그에게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등 2명의 대통령을축출한 '피플 파워' 혁명의 구심점 역할을 했고 산아제한에서 빈곤, 이라크 전쟁 등다양한 문제에 솔직하게 입장을 밝혀 사회를 이끌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2003년 11월 75세 정년을 맞아 30여 년 간 맡아온 마닐라 대교구장 직에서물러나고 건강문제로 활동을 많이 하지 못했으나 여전히 필리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남아있었다.

중국계 상인과 필리핀인 부인의 16자녀 중 14째로 태어난 신 추기경은 11살에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종교인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26세 때 고향인 중부 아클란 지방 인근에서 사제를 서품한 뒤 주교, 대주교를 거쳐 48세가 되던 지난 76년부터 8천만 명의 교인을 둔 필리핀 가톨릭교회의지도자로 봉직해왔다.

신 추기경은 특히 부패를 혐오했고, 불평등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설교 등을 통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 정치인을 공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세계무대에 널리 알려진 것은 지난 1986년 국민에게 독재자 마르코스와 결별한 당시 군 참모차장 피델 라모스와 국방장관 후안 폰세 엔릴레를 보호하기 위해마닐라시의 경찰과 군 본부를 포위하라고 요구하면서부터다.

이것이 마르코스를 축출시킨 '피플 파워' 혁명으로 이어졌으며 평화스러웠던 이봉기는 세계적으로 독재정권들을 교체시키는 전조가 됐다.


그는 또 2001년 부패와 실정 혐의로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축출하는데에도기여했으며 이 문제로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지지하는 빈민층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의 힘은 2003년 7월 수백명의 군 장병이 아로요 대통령에 대해 일으킨 반란을필리핀인들에게 '폭력으로 국가의 민주주의 체제 전복을 기도하는 단체들에 대해 경각심을 가질 것'을 촉구해 무산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입증됐다.

신 추기경은 또 사회문제에서도 낙태 반대운동을 주도하고 사형폐지를 주창했으며 미국 주도의 이라크 전쟁에도 반대했다.

그는 2003년 은퇴성명에서 "교황께서 나의 사임을 자비롭게 수용했으며 황혼녘에 드는 이때 하느님과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다"며 "내가 잘못이끌었거나 상처준 모두에게 용서를 구한다. 나를 다정하게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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