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9.14 22:11
수정 : 2010.09.14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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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켄터키주에 사는 메리 미첼이 60년 전 한국전쟁에서 숨진 오빠 찰스 패터슨 휘틀러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새크라멘토 비>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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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참전 미군의 여동생
군사기록 뒤지고 유전자 검사
평북 운산 논에서 유해 수습
1950년 11월 어느 추운 가을날. 미국 켄터키주 클로버포트에 사는 메리 미첼의 집으로 마을 보안관이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한국전쟁에 참전 중이던 큰오빠 찰스 패터슨 휘틀러(당시 22살) 상병이 행방불명됐다는 전보가 들려 있었다. 미첼의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렸고, 아버지는 그날 밤 갑작스런 심장발작을 일으켜 숨졌다.
인간에게 소중한 기억들은 늘 사소한 것들이다. 이제 66살이 된 미첼의 기억 속에 오빠의 모습은 면도용 크림의 생경한 냄새, 반짝반짝 윤이 나던 구두, 양모로 된 제복의 부드러운 느낌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오빠는 6피트 정도의 키에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얼굴이 호리호리해서 멋진 사람이었죠.”
중년이 되면서 미첼은 오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알고 싶어졌다. 2000년부터 한국전쟁과 관련된 여러 군사기록을 뒤지고,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만날 수 있는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04년 지인으로부터 미 국방부에 디엔에이(DNA)를 제출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지난 6월 미첼은 미군 인력자원본부(Human Resources Command)로부터 “오빠를 찾았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의 오빠는 중공군과 미군이 첫 조우한 운산전투에서 괴멸적 타격을 입은 1기병사단 8기병연대 3대대의 대원으로 11월2일 북한군에 생포돼 16일 처형됐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북한군 주민의 증언에 따라 북미 공동발굴팀이 확인에 나선 결과 평안북도 운산의 논바닥 아래서 오빠의 유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작은 둔덕 아래, 두개의 바위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논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지역 일간지 <새크라맨토 비>는 13일 “60년 만에 돌아온 휘틀러 병장(사망 뒤 1계급 추서)의 귀환을 환영하기 위해 지난 3일 1200명의 시민들이 모였다”고 보도했다. 오토바이를 탄 참전용사들이 성조기로 둘러싸인 휘틀러의 뒤를 따랐다.
“어릴 때는 오빠가 어디 무인도에 가서 살아 있거나, 북한 여자와 결혼했을 거란 상상을 하곤 했어요. 그래도 오빠가 이렇게라도 돌아왔잖아요. 많이 기쁩니다.” 한국 국방부 통계를 보면, 한국전 미군 전사자 가운데 주검을 수습하지 못한 이의 수는 9월 현재 8022명에 이른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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