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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1.11 10:45 수정 : 2010.11.11 14:10

지구마을 인터뷰<8>
팔레스타인 아버지는 ‘최고의 복수’를 했다, ‘평화’로
“아들이 살린 아이는 아군도 적군도 아닌 아이일 뿐”

8월11일 싱가포르에서 피스보트에 합류한 뒤 뱃멀미와 함께 인도양을 통과했고, 해적이 들끓는 소말리아 해협도 무사히 지났다. 고비사막의 모래가 날아와 세상이 뿌옇게 보이고, 바닷물이 40도가 넘는다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정박해서 기름을 충전하고, 사막과 사막 사이의 수에즈 운하를 넘어, 8월 28일 이집트의 ‘포트사이드’에 닿았다.

기대했던 ‘케냐’ 같은 아프리카의 모습과 달리, 오히려 이슬람국가인 오만을 닮았던 이집트의 풍경. 사우나 같은 더위마저 오만을 닮은 이집트의 날씨 속에서 카이로까지 버스로 3시간을 달려가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구경했다.

 

울면서 구걸? 구걸하면서 울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카이로 시내를 거닐다, 길에서 우연히 자신을 팔레스타인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예넨’을 만났다. 예넨은 팔레스타인에서 가족을 잃고, 여기까지 와서 어렵게 살고 있다며 나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이집트에선 팔레스타인 사람이라고 거짓말하고 돈을 구걸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미리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말을 섞기가 싫어졌다. 무엇보다 얼마 남지 않은 이집트에서의 시간을 그렇게 허비하긴 싫었다. 근데, 이 아저씨. 내가 매정하게 대하니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울면서 구걸한다는 이야기도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바로 매몰차게 외면하고 그곳을 벗어났다. 돌아서서 걷는데 영 마음이 찜찜했다. 캄보디아에서 ‘툭툭 기사’ 똘라 아저씨를 만난 이후로 사람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는데, 또 의심병이 도진 것 같아서 찔리기도 했다. 그래서 발길을 돌려 다시 아저씨를 찾아 나섰다.

 

같은 레퍼토리로 다른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길 바랐다. 그래야 안 미안해지니까,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지니까. 근데, 이 아저씨, 길가에 주저앉아서 계속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옆에서 빵 파는 아저씨가 아까부터 저러고 있다며 뭐라고 하신다. 그리고 더듬거리는 영어로 말하는 예넨. 구걸하며 살게 된 자기 삶이 너무 억울해서 운다고 했다. 정말 미안했다. 내가 매몰차게 대한 것이 그 사람에게 큰 상처를 준 것 같아서. 진짜 팔레스타인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가. 옆에 앉아서 한동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인 것 같아서.

 

예넨이 진짜 팔레스타인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집트를 비롯한 이슬람 국가들에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흩어져 살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한국 언론에 비치는 ‘테러리스트’ 이미지와 달리, 그들은 힘없는 ‘난민’일 뿐이다.

 

장난감 총을 들고 놀고 있던 아이를 테러리스트로 오인 

예넨을 만난 이후, 피스보트에 돌아와서 팔레스타인의 모습이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에서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실제 그들의 일상은 어떻게 꾸려질까? 과연 하루하루 이스라엘과 총을 겨누며, 이스라엘을 저주하며 그렇게 살아갈까? 구호물자는 어떻게 나눠서 살아갈까? 아이들이 폭력적이진 않을까?

 

더운 열기 속에서 오랜 시간 이어진 항해와 이집트 여행으로 완전히 지쳐 떨어진 다음날, 드디어 피스보트는 지중해에 도착했고, 나는 바람 빠진 풍선 마냥 배 안에서 흘러다니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팔레스타인 관련 영화를 상영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팔레스타인이라고?’ 나는 용수철처럼 튀어나갔다.

 

영화제목은 <제닌의 심장(The Heart of Jenin)>. ‘트루먼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꼭 누군가가 나를 팔레스타인에 대해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영화처럼 ‘이동원쇼’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라면, 아마도 시청률은 형편없을 것이다.

 

영화는 팔레스타인 제닌이란 곳에서 시작한다. 2005년 11월, 이스라엘 군인들이 장난감 총을 들고 놀던 아흐메드(Ahmed Khateeb, 12살)를 테러리스트로 오인하고 쏘게 된다. 머리와 몸에 총을 맞은 아흐메드는 병원으로 후송되지만 결국 숨졌다. 사망하기 전, 아흐메드의 아버지 이스마일(Ismail)은 의사의 조언에 따라 아들의 장기를 기증한다. 5명의 이스라엘 아이들에게. 다큐멘터리는 그 과정과 2년 뒤 아버지 이스마일이 장기를 기증받은 이스라엘 아이들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버지 이스마일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그날 밤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지만, 점점 의문만 쌓여갔다. 이스라엘 군인들의 총에 쓰러진 아들의 장기를 이스라엘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기증한 아버지부터 전날 만났던 ‘예넨’까지, 커져만 가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의식의 블랙홀을 머릿속에 담은 채 이틀이 흘렀고, 8월의 마지막 날 피스보트는 그리스의 ‘피레우스(PIRAEUS)’에 도착했다.

 

바로 그 다큐영화에 나온 그가 내 앞에…대체 무슨 계신인가

8번째 정박지 피레우스에서 2일간 머물 예정이었기에 룸메이트인 ‘고로’와 외박 준비를 하고 그리스 땅에 발을 디디려던 참이었다. 그때 배의 통로에서 붐비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디서 많이 봤던 사람과 마주쳤다. 아흐마드의 아버지 이스마일 카히드(Ismail Khateeb, 46). 영화에서 봤던 그가 내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이게 ‘트루먼쇼’, 아니 ‘이동원쇼’라면 정말 각본 하나는 기가 막히다. 이집트에서 우연히 길에서 우는 예넨을 만나게 하고, 그 다음날 영화 보여주며 눈물 짓게 만든 다음, 풀리지 않은 의문에 머리가 터지기 직전 문제의 당사자를 내 앞에 보내다니. ‘오버’하는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정말 무슨 계시인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라고, 무엇을 고민하라고 이런 상황이 내게 주어지는 걸까.

 

하선 절차를 밟고 있던 그와 인사하고 싶어 기회를 엿보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내 소개를 했다. 영화를 보고 팬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그가 웃는다. 하긴, 심각하기 짝이 없는 다큐 영화를 보고 팬이 되었다고 했으니 웃음이 나올 만도 하다. 마침 옆에 있던 피스보트 스태프가 나를 한국에서 온 ‘언론인’이라고 소개했다. (피스보트에선 가장 유명한 한국 언론사인 ‘한겨레’에 여행기를 연재한다는 이유로, 피스보트 스태프들이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일 뿐, 절대 의도한 건 아니다.) 그 말에 이스마일 아저씨는, 어쨌든 한국에 제닌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겠다면서 무척 반가워하신다.

정녕 꿈은 이뤄졌다, 달밤의 농구를 하던 그와 또 우연히

 

이스마일 아저씨와 피스보트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나선 그리스 여행. 여유로운 분위기와 달리 내내 내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다. 이스마일 아저씨가 단 7일만 피스보트에서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7일 중 4일은 항구에서 보내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아저씨와 ‘독대’하는 시간을 가지리라 마음먹으며, 아름다운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를 ‘독한 마음’으로 구경했다. 그렇게 룸메이트 고로와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배로 돌아왔다. 마침 돌아오는 길에 또 이스마일 아저씨와 마주쳤다. 수많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아저씨가 나를 알아보셨다. 스타에게 기억된 팬 마냥 기분이 좋아진 나는 아저씨와 그리스에서 무얼 했으며 무엇을 먹었는지 등등, ‘피스보트식’ 소소한 안부인사를 나눴다.

 

꿈은 정녕 이루어진다. 그날 밤, 아저씨와 우연히 또 만난 것이다. 밤 12시에 별 보러 올라간 갑판에서였다. 아저씨는 그 옆에서 농구를 하고 계셨다. 처음 오른 크루즈라 잠이 오지 않았던 건지, 아들 생각이 났던 건지 혼자 ‘달밤의 농구’를 하고 계셨다. 그 모습이 너무 외로워 보였다. 그래서 샤워를 마치고 올라간 갑판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농구를 같이 했다.

 

한참을 농구를 하고 내려와서 별 말없이 둘이서 맥주를 한 잔 했다. 아랍어라서 말이 안 통하기도 했지만, 다른 때처럼 손짓 발짓 해가며 이야기를 나누긴 싫었다. 그냥, 말없이 오래 옆에 앉아 있고 싶었다.

 

이스마일 아저씨와 나는 다음 날부터 조금 더 친해졌다. 아저씨가 먼저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농담도 하고, 밥도 같이 먹고, 이야기도 나눴다. 그 뒤 강연회에서 눈물지으며 아픈 이야기를 전하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았다. 아흐메드를 잃었던 이야기에서부터 팔레스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까지.

 

그가 먼저 가슴에 묻은 아들 얘기를 꺼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스마일 아저씨가 나를 통해 한국 사람들에게 제닌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먼저 제안을 하셨다. 그때까지도 정말 내가 언론인이라고 믿고 계셨던 거다. 그래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드렸다. 여행 중이고, 대학생인데, 어떻게 하다 보니 글을 쓰고 있다고. 내 말을 다 듣고 난 뒤에도 아저씨는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신다. 따로 시간을 내서 진지하게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어쨌거나 한국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거니까, 제닌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시간을 내달라고.

 

제닌은 이스라엘의 제약을 받긴 하지만, 어엿한 팔레스타인의 영토이다. 오슬로 협정 이후 인정받은 팔레스타인 정부가 통치하는 곳. 이스마일 아저씨가 자랑스레 보여주던 여권에 적힌 팔레스타인. 그곳에도 다른 제3세계 국가들처럼 한국 휴대폰, 한국 자동차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도 한국에 관심이 많은데 정작 한국 사람은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고대하던 ‘독대’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처음부터 궁금한 걸 물어보진 못했다. 이미 알려진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들의 죽음에 관해서 물어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가자 지구에 후원했었고, 이집트에서 예넨을 만나서 팔레스타인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둥, 물어보지도 않은 내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그러자 이스마일 아저씨가 먼저 떠나보낸 아흐메드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자식들 중에 가장 명석하고, 창의적이었던 아저씨의 소중한 아들 아흐메드. 이스라엘군의 총에 쓰러진 어린 아흐메드는 제닌에 있는 유일한 병원으로 갔지만, 상태가 위급해져 이스라엘에 있는 큰 병원으로 후송해야 했다. 그렇지만 우리의 상식대로 바로 구급차를 타고 달려갈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벽, 체크포인트(Check-point)가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일찍 병원에 도착했으면…, ‘통곡의 벽’에 막혀 통곡

체크포인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국경 같은 곳이다. 항상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곳을 지킨다. 허가를 받지 못한 팔레스타인 사람은 이스라엘로 넘어갈 수 없다. 넘어갈 수 있는 사람들도 항상 몇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동권’뿐만 아니라 경제마저 제약하고 있는 체크포인트 때문에 피스보트에 오기까지 이스마일 아저씨는 제닌에서 요르단까지 40km의 거리를 5시간 걸려 통과해야 했다. 체크포인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지만 아흐메드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조금 일찍 병원에 도착했다면, 지금쯤 다른 사춘기 소년처럼 여드름 가득한 얼굴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아흐메드. 하지만 체크포인트는 아흐메드의 미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몸에 박힌 총알은 이스라엘의 것이었지만, 그는 분명 피부가 까만 팔레스타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적군의 아이들에게 아들의 장기를 기증할 생각을 했을까?

 

“전 피부가 하얀 이스라엘인이 아니라, ‘사람’에게 아흐메드를 보낸 것입니다. 아흐메드가 살린 아이들은 적도 아군도 아닌 아이들일 뿐입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영화 속에서 장기기증을 받은 아이들의 아버지들도 팔레스타인 사람이 기증한 걸 알았다면 주저했을 거라고 인터뷰했던데, 대체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린 건지. 복수심은 일지 않았을까?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내가 한 일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더 혼란스럽게 했죠.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것만큼 큰 복수가 어디에 있겠어요?”

이스라엘 넘어 전 세계에 충격 줘 ‘평화센터’까지 건립

정말 그가 내린 결정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스라엘의 장관이 다시는 아이들이 사망하는 일은 없을 거란 약속까지 하게 만들었으니까. 물론 그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흐메드가 숨진 뒤에도 지금까지 420명의 아이들이 더 희생되었다.

 

그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 뒤 많은 사람들이 제닌을 찾아왔다. 그 중 독일 대학생들이 영화 <제닌의 심장>을 만들었고, 이탈리아에서 온 활동가들의 도움으로 제닌에 아이들을 위한 센터가 건립되었다. 바로 ‘평화를 위한 쿠네오 센터(Cuneo Center for Peace)’다.

 

작은 건물에서 200명의 아이들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던 이 센터는 지금 새로 지은 건물에서 400명의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다. 갇힌 공간, 많은 제약 속에서 살아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공공시설도 문화공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그 땅에서, 쿠네오 센터는 사람들을 위한 공공 센터 구실을 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어머니들에겐 여성인권에 대한 교육을 한다. 평화를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팔레스타인 공동체의 밝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게 쿠네오 센터가 하는 일인 것이다. 평화 속에서 살지 못했던 아들을 대신해서, 이스마일 아저씨는 ‘평화로운 팔레스타인’이라는 꿈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인데, 증오심 같은 건 없을까? 내가 만난 원폭피해자 데루오 이데구치 할아버지는 ‘증오’야말로 전쟁을 일으키는 가장 위험한 요소라고 했다. 서로 피 흘리며 싸우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틈바구니에서 아들을 잃은 이스마일 아저씨. 아저씨는 아무리 평화를 지키고 싶어 한다고 하지만,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 속에 한 줄기 증오심은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는 “복수는 분명히 할 것이고, 지금도 하고 있다”고 강조하신다.

 

전 세계에서 방문하는 봉사자들의 힘으로 운영 

“나는 총이 아니라 아이들의 악기로 이스라엘에 복수를 하고 있습니다.”

 

센터에서 아이들에게 평화를 노래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통해서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중무장한 군인들이 지키는 체크포인트 앞에서 아이들이 가슴으로 부르는 평화의 노래를 부른다. 그것이 바로 그가 ‘총’이 아닌 ‘악기’로 복수하는 방식이다.

 

센터는 전 세계에서 방문하는 봉사자들의 힘으로 운영된다. 후원금을 모아 봉사자를 위한 게스트하우스를 만들고, 사설 경호원을 고용해서 그들의 안전을 돌본다. 지난 8월엔 정작 아흐메드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제닌의 이웃들을 위해 이탈리아의 도움으로 극장 ‘제닌 시네마(Jenin Cinema)’도 열었다. 총 앞에 쓰러진 아흐메드가 만들어낸 커다란 평화의 움직임들. 피스보트 승객 1000명도 못 해낼 일을, 아흐메드의 아버지 이스마일이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날 항구에서 사온 싸구려 와인에 맥주까지 마시며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팔레스타인에 관한 내 의문들은 여전히 물음표가 찍힌 채였지만, 솔직히 말해서 무엇이 궁금했었는지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다. 이스마일 아저씨를 보면서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부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지만 어쨌거나 똑같은 ‘사람’이 사는 곳 아닌가.

다들 그러하듯이 행복하게 살길 바랄 뿐이다. 때로 군인들의 총에 위협받고, 체크포인트라는 벽에 가로막혀 좌절도 하겠지만 그들 역시 우리처럼 평화를 꿈꾸며 살 것이다.

그들에 대해 편견을 갖고 의문을 품고 있던 내가 오히려 이상했던 거다. 술은 많이 마셨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다. 그래도 잊지는 말아야지 하는 다짐도 했다. 아직도 힘들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그리고 평화를 줄 수 있게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이 더욱 강해졌다.

 

천문학적 돈 들여 짓는 성당과 한푼 두푼으로 지어진 센터

 

7일간의 일정을 마친 뒤 아저씨는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피스보트를 떠났다. 모로코에서 이집트, 요르단을 거친 뒤 체크포인트를 통과해서 돌고 돌아서 겨우 집으로 돌아갔을 이스마일 카히드 아저씨. 그는 11월엔 호주의 한 대학으로부터 초청을 받아서 강연을 하러 갈 예정이라고 했다. 자신을 불러주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가서 아흐메드와 평화를 위한 센터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강연을 통해 아저씨는 올해 센터에 필요한 운영자금 1천만 원을 모으는 게 목표다. 그리고 자동차도 만들고 휴대폰도 만드는 한국의 기술자들이 제닌에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기술자도 없고, 공장도 없는 제닌에서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에서 들렀던 ‘사그라다 파밀리야’라는 성당이 떠올랐다. 100년이 넘도록 짓고 있지만 아직도 20년은 더 지어야 한다는 그곳. 성당 리플렛에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다고 자랑스레 쓰여 있었다. 그 ‘자랑’과 부족한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전 세계를 찾아가는 이스마일 아저씨의 모습이 혼라스레 겹쳐졌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선 푼돈에 가까운 그 돈을 모으기 위해 애쓰는 아흐메드의 아버지 앞에서, 괜히 성당 구경하며 신기해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엄청난 돈으로 지어질 성당보다,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지어진 제닌의 쿠네오 센터가 분명 훨씬 더 아름다울 것이다.

 

글=이동원, 사진=피스보트 제공

 

**혹시 이 글을 보고 팔레스타인 제닌의 이스마일 아저씨를 방문하고 싶은 분은 연락을 주세요. 친절한 이스마일 아저씨가 모든 교통수단을 연결해주실 거예요. 팔레스타인 아이들과 즐겁게 뛰어놀 마음만 있다면 그들과 가족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특별한 기술을 갖고 있지 않아도, 많은 돈을 후원하지 않아도요. 지금 제닌에, 팔레스타인에 필요한 건 우리의 관심과 응원입니다.

25살 청년 이동원씨의 ‘젊은 영혼의 지구마을 인터뷰’를 새로 연재한다. 지난 7월26일 여행길에 오른 이씨는 앞으로 7개월간 지구마을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인터뷰할 예정이다.

책 욕심, 친구 욕심, 공상에 대한 욕심이 많은 25살의 이 대한민국 청년은 무엇보다 가난한 지구마을 이웃들이 행복해지는 ‘착한 세상’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하다.

이씨는 앞으로 베트남, 캄보디아, 타이, 싱가포르, 멕시코, 코스타리카, 파나마, 에콰도르, 페루를 돌아볼 예정이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그곳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꿈을 꾸는 사람들과 만나 그 꿈을 공유할 예정이다. 그는 그래서 싱가포르에서 멕시코까지 그를 실어다줄 피스보트 안에서도 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는 제3세계 선원들의 정규직화에 대해 고민하고, 일본의 보수적인 노인승객들과 역사에 대해 소통하길 꿈꾼다.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을 휴학중인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낮은 삶에 눈을 돌리고 더불어 사는 일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자원봉사로 인연을 맺은 지리산고등학교에 잠비아인 유학생 1호인 켄트 가 입학하자 튜터를 자청해서 한국에서의 유학 생활이 원활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켄트는 저자의 든든한 후원으로 서울대 후배가 됐고, 세간의 화제를 모으면서, 본의 아니게 1~2년간 거의 그의 매니저 노릇을 했다. 또 켄트가 문화방송 주말프로그램 <단비>에 소개되면서 방송팀과 함께 잠비아를 다녀왔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지난 2년간 어른들을 보살피는 요양원에서 공익근무하는 틈틈이 재밌을 것 같아서’ 세계 곳곳을 여행해온 열정 바이러스다. 케냐에선 마사이족 캠프에 머물면서 초등학생들을 위한 교실 수리 일을 했고, 다큐영화 <우리학교>의 실제 학교가 운동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으로 직접 가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운동회에 참가하고 대화를 나눴다. 또 4박5일간 베트남으로 날아가 학살피해 가족들을 만나고 돌아오기도 했다. 2010년 7월 26일 2년간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을 들고 7개월 일정으로 여행을 떠났다. (돌아올 때 티켓은 예약하지 않았다.) 기왕 떠나는 여행, 최소한 지구마을에 피해는 주지 말자,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게 하자고 다짐하고 현지에서 활동하는 NGO 단체들을 직접 수소문해서 일정을 잡았다. 소통을 위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떠나기 전까지 일본어와 스페인어를 열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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