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0.12.21 15:14 수정 : 2010.12.21 15:14

잡스가 애플에 복귀한 까닭은

1991년 픽사는 디즈니로부터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위기의 잡스에겐 그건 마지막 희망이었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잡스에겐 디즈니가 ‘백마를 탄 왕자’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계약은 철저히 픽사에게 불리했다. 13쪽이나 되는 계약서를 보면, 함께 제작하는 영화가 <인어공주>만큼 성공하지 못할 경우 픽사에게 돌아가는 수익은 거의 없었다. 디즈니는 영화제작에 들어간 뒤에도 ‘언제든 영화를 포기할 수 있는 권리’를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행사할 수 있었다. 이 계약은 앞으로 3편을 만드는 동안 계속 적용 받도록 했다. 영화 캐릭터의 로열티 역시 디즈니가 독점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컴퓨터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장편 영화였다. 극장에서 끝까지 볼 관객은 없을 거라고 여겼던 시절이었다. 픽사는 기껏해야 디즈니와 손잡고 싶어 안달하는 일개 하청회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픽사는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벅스 라이프〉, 〈토이 스토리 2〉,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를 잇따라 흥행에 성공시키며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우뚝 서게 된다.


이유는 바로 남과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픽사는 디즈니의 <미녀와 야수>같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건 디즈니의 방식이었다. 픽사는 다르게 만들고 싶었다. “공주와 왕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특별한 캐릭터를 만들어 갔다. 픽사의 등장인물은 멍청하지만 귀엽고, 순수하지만 삶에 대해 고민하는 캐릭터였다.

성공은 기회를 포착하고 끈질기게 매달리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기 마련이다. 1995년 추수감사절 시즌 <토이스토리>가 개봉되면서, 실리콘밸리의 미운오리새끼였던 픽사는 백조로 변신한다. 영화는 곧바로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역대 추수감사절 개봉작 가운데 최고 흥행작이 됐다.

잡스는 영화 개봉 일주일 뒤에 픽사의 기업공개(IPO)를 단행했다. 주식공모가는 22달러였지만 상장 첫날 49.50달러까지 올랐다가 39달러로 마감했다. 픽사는 1억3970억 달러의 자본을 끌어들였고, 픽사의 주식 80%를 갖고 있던 잡스도 마흔의 나이에 또 다시 돈방석에 앉았다. IPO 뒤 잡스가 갖고 있던 픽사의 주식 가치는 11억 달러가 넘어섰다. 10년 전 그가 애플을 떠날 때 갖고 있던 애플 주식의 자산 가치와 맞먹었다. 픽사의 성공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컴퓨터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최초’였기에 가능했다.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끊임없이 ‘도전’했던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더욱 빛났다.


픽사와 디즈니의 계약 만료일이 다가오자 잡스는 디즈니와 계약을 중단하겠다며 강공을 편다. 잡스가 이 같은 승부수를 던진 배경은 바로, ‘고객의 신뢰’였다. 이쯤부터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이 디즈니보다 픽사 브랜드를 더 신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디즈니 애니메이션보다 픽사의 애니메이션을 더 신뢰한다는 주부들의 설문 조사가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디즈니와 픽사의 입장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디즈니가 픽사의 눈치를 살펴야 할 판이 되었다.


결국 디즈니는 픽사에 합병을 제안했다. 2006년 75억 달러짜리 합병 계약을 맺으면서 잡스는 디즈니의 최대 개인 주주가 되고, 캣멀은 디즈니와 픽사의 사장이 된다. 잡스는 달랑 500만 달러에 픽사를 사들인 뒤 디즈니에 75억 달러에 파는 대단한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잡스는 픽사를 경영하면서 돈으로는 얻지 못하는 새로운 감성에 눈을 뜨게 된다. 토이 스토리의 성공 요인은 창의성과 기술력의 결합이었다. 픽사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은 단순히 영화라는 상품이 아니라 ‘재미’와 ‘감동’ 그리고 ‘꿈’을 보았다. 잡스 역시 픽사 경영으로 감성이라는 가치를 배운다.

잡스가 재기에 성공하고 있을 무렵 애플은 추락하고 있었다. 애플 경영진 역시 잡스처럼 자신들의 주력 분야가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하드웨어라고 여겼다. 이는 전략적으로 잘못된 판단이었다. 컴퓨터는 치열한 가격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애플처럼 고가의 컴퓨터가 먹혀들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소프트웨어 부문에서 문제가 불거지기 했다.

애플의 또 다른 문제는 혁신에서 뒤처지고 있었다. 잡스가 만들었던 매킨토시는 혁신적인 GUI와 강력한 그래픽 소프트웨어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GUI를 채택한 윈도 시리즈를 잇달아 내면서 애플의 시장을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다. 한 번에 여러 작업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멀티태스킹에서도 맥은 윈도에 뒤처지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애플의 시장점유율은 20%에서 8%로 떨어졌고, 10년 동안 CEO였던 존 스컬리는 1993년 물러나고, 애플의 유럽 마케팅 책임자였던 마이클 스핀들러가 새 CEO로 임명된다.


하지만 애플은 도무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애플은 새로운 선장이 필요했지만, 침몰중인 애플호의 선장을 맡으려는 사람을 찾기 쉽지 않았다. 1996년 애플 이사회는 다시 애플 CEO로 길 아멜리오를 영입한다.

아멜리오는 새로운 소프트웨어 개발 없이는 애플의 희생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는 외부에서 새로운 운영체제를 찾아보기로 하고 썬마이크로시스템스 등의 IT기업은 물론 잡스의 넥스트에까지 접촉하게 된다.


최종 심사 대상에 오른 운영체제는 넥스트의 넥스트스텝과 비(BE)에서 만든 BeOS였다. 비는 잡스가 애플을 떠난 뒤 R&D 총책임자로 사실상 애플 제품을 좌지우지해왔던 장 루이 가세가 만든 회사였다. 잡스와 가세는 악연도 있었다.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나기 직전 스컬리에 반기를 들기 위해 가세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가세는 오히려 스컬리에게 이를 누설해 잡스가 애플에 쫓겨나가게 된다.

아밀리오는 잡스와 가세를 불러 프레젠테이션을 열었다. 잡스는 뛰어나고 유창한 프레젠테이션을 과시했다. 넥스트스텝이 단순한 아이디어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운영체제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장 루이 가세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그는 빈손으로 혼자 나타났다. 넥스트의 승리는 거의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96년 12월말, 애플은 넥스트를 합병한다는 방침을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잡스는 넥스트 매각의 대가로 현금 3억7750만 달러와 애플의 주식 150만주를 챙겼다. 현금은 넥스트의 기존 투자자들에게 돌아가고, 주식은 잡스가 챙겼다. 애플은 그에게 특별고문이라는 직책을 제시했다.

독창적인 운영체제였으나 단지 넥스트 컴퓨터에서만 작동된다는 이유로 판매가 부진했던 넥스트스텝이 그 주인공이 됐다. 정혁준 기자

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