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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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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국립대 박노자 교수의 ‘설중득녀기’
월급 80% 유급휴가 56주…검진·출산·산후조리 모두 무료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 재직중인 박노자 교수가 득녀기를 보내왔습니다. 사적인 글이라 볼 수도 있지만 출생률 저하로 저출산 대책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내용이 적지 않아 소개합니다.
2011년1월3일 아침, 눈보라가 계속 회오리쳤을 때에, 저희 가족은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드디어 “사라” (沙羅, Sarah, Сарра)라는 이름의 딸을 얻었습니다. 사라가 태어나기 전까지, 제가 고생을 하는 제 아내를 응시하면서 고성(高聲)으로 알고 있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이름을 불렀는데, 사라가 피투성이와 함께 세상에 외출하고 나니 왠지 만사휴의(萬事休矣)와 같은 느낌이 들어 창문 밖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 회오리쳤던 눈보라를, 죽을 때까지 기억할 것 같습니다.
아이 탄생이라는 걸 대개 세상에서 경사로 알고 축하하는 풍습이 있지만, 이게 과연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생로병사란 원래부터 고해(苦海)인데다, 지금 퇴락해가면서 언제 세계전쟁으로 번질지 모를 후기자본주의는 그 태생적인 존재의 고통을 더욱더 증가시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밑으로부터의 본질적 변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사라가 살아갈 세계는 고갈돼가는 자원을 놓고 서로 패권싸움을 벌이는 열강들의 세계, 환경 파괴의 본격화되는 세계, 자본이 국제화되는 만큼 노동이 지속적으로 불안해지는 세계일 것입니다. 세계가 이렇게 돼가는 데에 대해, 저를 포함한 기성세대의 책임부터 무겁죠. 그런데 아이 탄생은 꼭 경사만은 아니더라도 인생의 분수령과 같은 아주 특별한 일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오슬로에 와서 사라를 챙겨주는 데에 도움 주시는 사이에 약간의 망중한(忙中閑)을 얻은 저는, 이제 사라의 탄생을 전후로 해서 저희가 어떤 경험들을 했는지 묘사해보려고, 이 기문(記文)을 남깁니다. 제 개인의 체험과 기억을 사회화(化)하는 것은 적선(積善)의 방편인데다가, 저희의 개인 경험을 통해 복지국가의 효능들을 엿볼 수 있기에, 이 기문이 멀리에서 한반도 남쪽의 진보 투쟁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임신이 확인되고 나서는, 아내는 저희 지역의 보건소 (helsestasjon)에 등록돼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초음파 사진을 찍곤 했습니다. 물론 이는 저희 개인 비용 한푼 들지 않았던 일이었죠. 예상 출산 날짜에 앞서 3주 전에 음악교사인 아내는 학교에서 유급휴가를 받아 그때부터 완전히 출산 준비에만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체로 노르웨이의 법으로는 출산 관련 유급휴가란 46주 정도입니다. 만약 월급의 80%에만 만족하다 그러면, 56주로 늘릴 수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는 10주를 아버지가 받아야 하는데, 언제 받는가는 부부 사이의 합의에 따라 본인이 알아서 결정합니다. 저 같으면, 아마도 올해 9월부터 받을까 지금 계획합니다. 어차피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직장에서 무조건 “복지휴가”라는 이름으로 2주의 유급휴가를 추가로 주니까 지금의 급한 불을 충분히 다 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경우에는 출산 이전의 3주와 출산 이후의 6주는 의무적 (필수적) 출산 휴가에 속하고 그걸 제때에 받을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나머지의 27주를, 본인이 알아서 기간을 정해 받는 것입니다. 제 아내 같으면 바로 봄학기에 받을 수도 있지만 본인의 의향에 따라 약간 뒤에 받을 수도 있고, 또 50% 시간에만 일하면서 그 휴가 기간을 두 배로 늘릴 수도 있습니다. 좌우간, 본인 마음만 먹으면, 출산 3주 전부터는 직장 등을 다 잊고 거의 8개월간 아이를 챙기는 데에만 전념해도 되는 것이죠. 월급을 그대로 받고 원래의 직장에 당연히 돌아갈 수 있을 것을 알면서요. 그러니까 저희가 아는 현지인 부부 대부분은 아이 2-3명씩이나 키우고, 아이를 키우는 즐거움을 인생의 최고의 낙으로 삼죠.
출산이 임박했을 때에 저와 아내는 저희가 사는 뱌룸 (Bærum)군 (오슬로 근방의 위성도시 격입니다)의 중앙 종합병원으로 향하고, 그쪽의 출산과 (føden)에서 저희 방을 배정받았습니다. 이쪽 같으면 절대다수의 남성 배우자들이 여성의 출산과정에서 꼭 함께하면서 이런저런 심부름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 출산 과에서는 남성 배우자에게까지 음식 등이 제공되는 것은 물론이고, 작은 도서실까지 다 구비돼 있었습니다. 출산을 준비하면서 문화 생활하게요. 저희는 담당 간호사와 담당의사도 배정받았는데, 간호사는 의사보다 나이와 경험이 꽤 많았습니다. 독특한 것은, 명찰에 명기돼 있는 직급명이 아니었다면 제가 그 둘 중에서는 누가 의사인지 누가 간호사인지 아마도 몰랐을 것입니다. 서로 대하는 것은 철저하게 평등했으며, 오히려 의사는 경험이 많은 간호사에게 이것저것 물어가면서 자기 맡은 일을 처리해갔습니다. 제 아내에게도 명령을 했다기보다는, “배에 힘을 실어주는 게 좋겠다”, “제발 마지막 몇 분 참아주세요” 와 같은 방식으로 제안 내지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막바지의 출산 과정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저는 아내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 그저 그 산실(産室)의 구석에서 “옴마니바드메훔”, “나무아미타불”과 같은 소리를 읊곤 했는데, 통성염불했음에도 한 번도 의료진의 제지를 받은 바 없었습니다. 경험이 없어서 모르긴 몰라도 과연 대한민국의 산부인과에서 그렇게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어요.
아이가 드디어 나온 뒤에 아내가 휴식기에 들어가고 약 한 시간 지나서 저희 두 사람은 식사 제공받았습니다. 탁자에 노르웨이 국기가 꽂혀 있었던 것은 저로서는 국민주의적 의례 일종으로 꽤 흉해 보였지만, 그 힘들고 힘들었던 출산 과정에서 의료진이 보인 친절에 많이 감복했습니다. 출산 과정이 끝난 뒤로는, 저희 두 사람은 같은 병원 다른 층의 산후조리과 (barselavdeling)의 가족 실로 옮겨졌습니다. 거기에는 통상 이틀에서 사 일까지 지내게 돼 있는데, 하는 일은 수유 훈련부터 산모와 신생아의 혈액검사, 황달 감염 검사 등까지입니다. 역시 담당 간호사가 배정돼 언제든지 수유기술의 문제라든가 분유를 가장 효과적으로 타는 법이라든가 등등을 일대일로 상담 받을 수 있어 정말 초보 부모에게는 “생존 훈련”에 가깝습니다. 음식은 하루에 네 번 나오는데, 대개 빵 등 분식 위주라 한국인의 식성에 잘 맞지 않지만, 산모에게 필요한 영양 등이 잘 조절돼 있는 것 같습니다. 배식소에 나가니 대개 부딪치는 이들은 같은 남성들이었습니다. 물어보니 산후조리과의 가족실에서 남성배우자가 산모와 끝까지 같이 있는 것은 여기에서 만인의 통상적 관습이더랍니다. 산후조리과에서 만나는 산모들은 물론 대단히 피곤해 보였는데, 얼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무한한 여유이었습니다. 그들이 출산이라는 인생의 꼭대기에 올라가 그 산행을 즐기고, 사방을 여유롭게 둘러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출산과도 산후조리과도 다 무료이었다는 것이죠. 병원에 왕래하면서 쓰게 된 택시요금까지 사회복지사무실 (NAV)에서 일부분 보상받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여기에서 필수적인 단서를 달겠습니다. 저는 노르웨이의 사회제도를 무조건 찬양할 생각은 없습니다. 노르웨이도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일부분이고, 노르웨이사람들이 자동차 대신에 즐겁게 타는 자전거들을 만드는 중국노동자들에게는 노르웨이의 풍요한 복지제도의 이야기는 그림 속의 떡일 뿐일 것입니다. 그건 그렇다고 치지만, 기업들, 부자들 세금만 제대로 내고 그 세금을 사대강죽이기와 북한 동포를 죽일 무기의 사재기에 쓰지 말고 민중의 기초적인 복지에 쓴다면, 이렇게 고통이 많을 수밖에 없는 출산도 어느 정도까지 즐겁고 여유로운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여유라는 것은 계급투쟁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쟁취한 노동자들에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급투쟁에서 이기긴커녕 자신들과 착취자들을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착각하는 노동자들에게 돌아올 것은 영원한 불안일 뿐이죠. 복지와 여유라는 것은, 지배자들에게 “하사” 받는 게 아니고 싸워서 얻는 것이죠. 그런데 적의 괴수를 “가장 존경하는 기업가”로 알면서 지내면 그런 싸움이라는 건 가능하겠습니까?
글 /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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