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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01 16:12 수정 : 2005.07.01 16:12

영국 왕실은 지난 2000년 9월15일 다이애나(1961~1997) 왕세자비의 보좌관이었던 패트릭 제프슨이 다이애나의 전기를 출판하려는 데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한겨레>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가 존 F. 케네디 2세를 비롯해 잠자리를 함께 한 남자들의 `섹스 성적표'를 매겼다는 주장이 제기돼또다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독일의 가십 전문 일간지 BZ 등은 지난 달 27일 영국 신문들의 보도를 인용해다이애나가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외아들 케네디 2세에게 10점 만점의 `섹스 성적'을 매긴 반면 남편이었던 찰스 왕세자에게는 1점을 줬다고 전했다. 다이애나의 측근이었던 시몬 시몬스가 최근 펴낸 `다이애나, 마지막 이야기'를 인용한 이 보도들에 따르면 다이애나의 승마 코치였던 전 기마대 장교 제임스 휴잇은 9점, 미술품판매상 올리버 호어(58)은 6점을 각각 받았다.

▲ 존 에프 케네디 2세. <한겨레>
심리치료사였던 시몬스는 찰스 왕세자와의 불화로 정신적으로 불안했던 다이애나를 기(氣)치료 등 대체의학으로 치료하는 과정에서 내밀한 대화를 자주 나눴다. 시몬스의 주장에 따르면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가 "침대에 들자마자 일을 끝낸 뒤 바로 잠에 곯아떨어졌다"면서 "여자의 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혹평했다. 또 86년부터 5년 동안 사귀었던 휴잇에 대해선 "섹스 능력은 탁월하지만 섹스 외에는 관심이 없고 나를 성의 노예로 다루려했다"고 비판했다.

다이애나는 그러나 케네디 2세의 경우 매우 지적이고 친절했다면서 만점을 줬다. 두 사람이 첫 잠자리를 가질 무렵 찰스 왕세자와 이혼할 결심을 하고 있었던 다이애나는 총각이었던 케네디 2세에게 반해 함께 살 꿈을 꾸기도 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지난 1995년 1월 케네디 2세가 잡지 `조지'의 발행인 자격으로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다이애나는 기사화는 하지 않는 조건으로 자신이 묵고 있던 뉴욕 맨해튼의 카일라일 호텔 특실에서 대화만 나누자고 제의했다. 공교롭게도 케네디 전 대통령이마릴린 먼로와 바람을 피웠던 이 방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 첫 눈에 반했다.

시몬스에 따르면 다이애나비는 "우리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던 중 마치 화학작용처럼 서로에게 이끌렸고 결국 침대로 향했다"고 고백했다. 런던으로 돌아온 다이애나는 "두 사람의 별자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성술사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케네디 2세와 접촉을 유지했다. 그러나 둘의 뜨거운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96년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다이애나는 97년 마지막 애인 도디 알 파예드와 함께 승용차 사고로 숨졌다. 또 캐럴린 베시트와 결혼한 케네디 2세는 99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시몬스는 또 이 책에서 해리와 윌리엄 두 왕자가 찰스 왕세자의 소생이 아닐 것이라는 세간의 추정은 10년 전 실시한 유전자(DNA) 검사를 통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밝혔다.

한편 다이애나의 집사였던 폴 버렐은 시몬스가 주장한 `섹스 성적표' 등은 "터무니 없이 지어낸 이야기"라며 일축했다고 영국 일간 더 타임스는 전했다. 자신 역시 책을 통해 다이애나의 남자 관계에 관해 쓴 일이 있는 버렐은 "시몬스가 과거에도 다이애나에게 쓰레기 같은 몽상을 심어줘왔다"고 비난했다. 다이애나의 개인비서를 지낸 패트릭 젭슨은 "다이애나가 케네디 2세와 만나는 자리엔 나도 있었다"면서 "다이애나가 그에 대해 매우 예의바르고 능률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는 했다"고 말했다. 젭슨은 그러나 다이애나가 시몬스의 주장과 같은 말을 실제 했다면 "케네디 2세에 대한 호감을 여자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과장하는 것과방식으로 한 말일 뿐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베를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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