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7.01 18:44 수정 : 2005.07.01 18:44


1979년 11월9일 미국인 인질중 한명이 눈가리개를 하고 손이 묶인 채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 밖에 모인 군중들 앞으로 끌려나오고 있다. 당시 인질들 중 일부는 아마디네자드 새 이란 대통령 당선자가 인질사건 주모자중 한명이었다며, 오른쪽에서 두번째 인물(원 안)이 아마디네자드라고 지목했다. 오른쪽 사진은 공식 선거사이트에 올라 있는 아마디네자드 당선자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AP 자료사진

79년 당시 인질5명 “아마디네자드 현장있었다”
이란선 당선자 측근·반대파 모두 “말도 안돼”
백악관 “심각하게 여겨”…정치쟁점화 의도

4반세기 전 인질사건의 악몽이 미국-이란 관계에 다시 한번 큰 변수로 떠올랐다.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새 이란 대통령 당선자는 1979년 강경파 학생들이 주도한 테헤란 미국 대사관 인질사건에 가담한 주모자 중 한명이라고 당시 인질들 중 일부가 증언했다. 이란 지도자들은 즉각 이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지만, 백악관은 자료들을 조사 중이라며 “이번 사건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고 밝혀 정치적 쟁점으로 끌고갈 뜻을 밝혔다.

호메이니가 이끈 이슬람혁명 성공 직후 발생해 444일 동안 계속된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 인질사건은 미국-이란 관계를 악화시킨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두 나라 관계 개선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당시 인질로 잡혀 있던 5명은 29일 <에이피통신> 등 미국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텔레비전으로 이란 대통령 선거 보도를 보다가 아마디네자드를 알아봤으며, 서로 전자우편을 교환한 뒤 그가 인질범 중 한명이라고 확신하게 됐다고 밝혔다. 전직 정보관료였던 윌리엄 도허티는 “그를 8~10번쯤 봤다”며 “내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었던 당사자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전직 해군 대령인 도널드 셰어러는 아마디네자드가 인질들을 심문했던 사람 중 한명이라며 “그는 우리를 ‘돼지’, ‘개’라고 불렀고, 매우 강경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몇몇 인질들은 심문을 받을 때 눈가리개를 하고 있어 확실히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등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29일 “많은 의문을 갖게 됐다”며 “그가 사건에 개입했다면 많은 문제들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스티븐 해들리 미 국가안보보좌관은 당시 자료들과 아마디네자드에 대한 정보들을 분석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당시 사건을 주도했던 당사자들이나 아마디네자드의 측근들은 아마디네자드가 미 대사관 점령에 반대하고 옛 소련 대사관 점령을 주장했다며 결코 관련이 없다고 반박했다. 당시 지도부 6명 중 한명이었던 압바스 압디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신뢰할 수 있는 회원들 사이에만 비밀스럽게 일을 추진했기 때문에 다른 대학 학생이던 그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나중에 참여하겠다는 그의 제안도 거절했다”고 말했다. 하타미 대통령의 동생인 모하마드 레자 하타미도 당시 미 대사관에서 아마디네자드를 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들 두 사람은 아마디네자드의 반대진영인 개혁파에 속해 있다.

한편, 아마디네자드 당선자가 1989년 오스트리아에서 발생한 쿠르드족 지도자 피살사건에도 개입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체코 일간 <프라보>는 이란에서 추방돼 현재 이라크에 사는 쿠르드족 야당지도자인 호세인 야즈단파나흐의 말을 인용해, 당시 이란 혁명수비대의 고위 간부였던 아마디네자드가 쿠르드족 인사 3명을 살해하는 데 사용된 무기들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고 1일 보도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독재자 팔레비 송환 요구…급진파학생 444일 인질극

미 대사관 인질 사건

1979년 10월 미국 정부가 이슬람혁명으로 쫓겨난 팔레비왕에게 미국에서 병치료를 받는 것을 허가하자 이에 분노한 500여명의 이란 급진파 학생들이 11월4일 테헤란의 미 대사관에 진입해 대사관 직원 등 52명을 인질로 잡았다. 이들은 수십년 동안 미국의 군사·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이란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팔레비국왕을 재판할 수 있도록 미국이 그를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국의 카터 행정부에 치명타를 날렸다. 이란산 석유 수입 금지와 미국 내 이란 자산 동결 등의 조처에도 불구하고 이란 정부가 나서 팔레비왕 송환과 미국의 사과, 내정불간섭 약속 등을 요구하자, 카터 대통령은 비밀 인질구출작전을 승인했다. 그러나, 80년 4월 말 이란에 잠입하던 헬기가 추락해 특수부대원 8명이 숨졌고, 이란 시위대가 사망자들의 주검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이 전세계로 방송됐다.

이로 인해 재선을 꿈꾸던 카터 대통령이 80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란은 81년 알제리의 중재로 이란 자산 동결 해제와 사건 가담자를 기소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약속을 받고서야 인질들을 풀어줬다. 인질들은 그해 1월20일 레이건 대통령 취임 직후 석방됐다. 박민희 기자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