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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5.04 20:36 수정 : 2011.05.05 14:35

[빈라덴 사살 이후]
5m 넘는 담장 뒤에 ‘비밀의 집’
신문·우유배달…가정부 출퇴근
비상연락처 메모도 옷에 바느질

드러나는 은신처의 생활

사람들은 그곳이 마약상의 집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밀수꾼의 집이라고도 했다. 그런 사람들과 얽혀봐야 좋을 일이 없다. 오사마 빈라덴의 은신처는 오랫동안 그렇게 ‘비밀의 집’으로 머물러 있었다.

빈라덴의 집이 언론에 공개되고, 이웃의 증언이 속속 나오면서 5m가 넘는 담으로 둘러싸인 은신처의 생활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이 집은 지역 주민들에게 ‘와지리스탄 하벨리’라고 불렸다. 와지리스탄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접경지역의 이름이고 하벨리는 맨션이라는 뜻이다. 그 집에 와지리스탄 지역이 거점인 파슈툰족 사람이 살고 있어서 생긴 별명이다.

이 집에 사는 사람 중 외부로 드나드는 사람은 ‘나딤’이라고 불리는 남자 1명뿐이었는데, 그는 매일 빨간색 스즈키 미니밴을 타고 물건을 사러 나갔다. 그리고 항상 식용 염소를 한마리를 싣고 집으로 들어갔다. 신문과 우유도 배달됐는데, 배달부는 항상 문 앞에 두고 오기만 했다고 영국 <인디펜던트>에 말했다. 청소와 부엌일을 해주는 가정부도 있었다. 이들은 출퇴근을 했고, 집 안에서 빈라덴을 본 적은 없다고 <비비시>(BBC)가 전했다.

이들 말고는 집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웃들이 집 앞에 잠시 멈춰서거나 벽에 기대기만 해도 누군가 나타나 쫓아냈다. 이웃 소년 탄비르 아메드는 “크리켓을 하다가 그 집 담 안으로 공이 넘어갔는데 공을 주우러 들어갈 수는 없었다”며 “대신 어떤 아저씨가 150루피(1700원)를 주면서 공을 새로 사라고 했다”고 <인디펜던트>에 말했다. 이웃의 한 소년은 “그 집에 소년 몇명이 살고 있었고 가끔 물건을 사러 가게에 들르기도 했다”고 <비비시> 방송에 말했다. 빈라덴의 자녀인지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 아이들은 학교에도 다니지 않았다.

집 안에서의 삶은 매우 적막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웃과 교류가 전혀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전화나 인터넷도 연결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이 지역은 하루에 16시간이나 정전되기 일쑤였다. <에이피>(AP) 통신의 나할 투시 기자는 집 안을 둘러본 뒤 트위터에 “입구 근처에 조화로 장식된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고 적었다. 그 집 바닥에 떨어진 시계는 2시20분에 멈춰 있었다.

파키스탄 경찰 책임자 카마르 하야트는 방 6개짜리 이 집에는 “벙커는 없고 피신할 수 있을 만한 은신처, 지하실도 없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에 말했다. 이 집에서 몇명이 살았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미군이 습격했을 당시 이곳에는 20명 안팎이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은 3일(현지시각) 브리핑에서 “이 집에는 빈라덴의 가족 외에 두 가족이 더 살고 있었다”며 “빈라덴 가족은 2·3층에 살았다”고 말했다.

미국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4일(현지시각) 의회 소식통을 인용해 사살된 빈라덴의 옷에 500유로(약 80만원)와 비상연락 전화번호 2개를 적은 메모가 바느질된 것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미 정보당국이 의원들을 상대로 한 비공개 브리핑에서 설명한 내용이다.

이형섭 기자 sub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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