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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베트남 이주 여성들이 서울 종로구 삼청동 베트남 대사관 앞에서 항의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 허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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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국관리사무소 한마디에 입국길 막는 베트남 대사관
“우리 아이가 대사관 왔다갔다 하다가 폐렴에 걸렸어요. 왜 안보내주는 거예요.”
레 티 쑤언(26)씨는 5년 전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거주하고 있는 미등록 노동자다. 대구의 한 전자공장에서 일하던 그는 이곳에서 남편(35)을 만나 결혼해 아들과 딸을 낳았다. 아이들은 이제 세 살과 한 살이 됐다.
레씨는 한국살이가 너무 힘들어 고민 끝에 두 아이들을 데리고 베트남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갈 길이 막혔다. 주한 베트남 대사관이 아이와 함께 돌아갈 수 있는 여권 발급을 해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에 사는 그는 지난 해 12월부터 다섯 번이나 서울의 베트남 대사관을 찾았지만 대사관은 갖가지 이유를 들며 레씨의 여권 발급을 거절했다.
갈 때마다 대사관 직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당신의 아이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가져와라. 여권 발급 거부” (첫번째 방문)
“대구의료원에서 가져온 출생 증명서에 병원 등록번호가 없다. 번호 적어와라. 여권 발급 거부” (두번째 방문)
“출생 증명서가 조작됐을 수 있다. 유전자 검사를 해와라. 한국 목사는 다 사기꾼이다. 여권 발급 거부” (한국 목사와 세번째 방문)
“유전자 검사 서류도 조작됐을 수 있다. 여권 발급 거부” (베트남 신문기자와 함께 네번째 방문)
“비싼 병원비용을 한국 정부가 지원해줬을 리 없다. 사진도 규격에 맞게 안붙어 있다. 여권 발급 거부” (다섯번째 방문) 레씨는 “어떤 서류를 가져다 주어도 못믿겠다며 여권을 내주지 않는데 대체 어떤 서류를 더 가져다 주라는 말인지 알 수 없다”며 눈물을 흘렸다. 레씨는 지난 몇 달동안 베트남 대사관을 찾느라 100만원을 넘게 썼고 두 아이는 추위 속에 대구와 서울을 오가다 2주전 폐렴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 최근 레씨처럼 자녀들을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미등록 베트남 여성들이 아이들 여권을 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일부는 불법체류 단속에 걸려 고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발이 묶여있다. 자칫 아이들만 덩그러니 한국에 남은 채 아이의 부모들만 추방될 수 있다. 응웬 티 톰(24)씨도 같은 일을 겪고 있다. 자녀의 여권을 받으려고 두 번이나 대사관을 찾았지만 역시 거부당했다. 대구의 버섯농장에서 일하는 응웬씨는 친자 확인을 위한 유전자 검사를 두 번이나 받아 대사관에 친자확인서를 제출했다. 대구에서 서울을 오가는 교통비만 50만원을 넘게 썼다. 응웬씨는 “너무 힘들고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왜 우리 (베트남) 정부가 나와 아이들을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지 모르겠다”며 울먹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대구이주민선교센터의 설명을 종합하면, 2년 전 베트남 결혼 이주 여성이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자녀를 데리고 몰래 베트남으로 건너가는 일이 벌어졌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법무부 출입국 관리사무소는 주한 베트남 대사관에 ‘아이를 데리고 출국하는 베트남 여성에 대한 출국 심사를 엄격하게 하라’는 요청을 했다. 이후 주한 베트남 대사관은 출생증명서,친자확인 증명서, 산모 수첩 등을 제출하도록 심사를 강화했다. 그런데 문제는 베트남 대사관에 어떤 서류를 가져다 주어도 아이들 여권이 발급되지 않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일부 베트남 여성들은 브로커를 통해 여권을 발급받고 있는 실정이다. 브로커에게 700만원을 주면 주한 베트남 대사관은 여권을 쉽게 발급해준다는 것이 베트남 여성들의 증언이다. 20만원 정도면 발급받을 수 있는 여권을 700만원을 들여 발급받고 있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베트남 여성들이 빚을 지게 된다. 박순종 대구평화교회 목사는 “공식 서류를 갖추어 제출해도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는 베트남 대사관이 불법적인 방식으로 브로커를 통하면 여권을 발급해주고 있다. 부패한 베트남 대사관 직원들이 브로커들에게 뒷돈을 받아 챙기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고 성토했다. 베트남 아이들이 국적 불명의 고아가 되어 덩그러니 한국 땅에 남을 수 있지만 한국 정부도 딱히 손을 쓸 방법이 없다. 대구 이주민선교 센터에서 일하는 고경수 목사는 “이 문제에 대해 법무부에 민원을 넣자 ‘주한 베트남 대사관에 협조를 요청할 수 있을 뿐 딱히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내정간섭이 될 수 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고 전했다. 황공하이 주한 베트남공사는 이날 기자회견 현장에 나와 “친자확인을 위해 유전자 검사를 하는 게 베트남 이주여성들에게 부담되는 것을 알고 있지만, 현재 다른 대안은 없다”고 말했다. 17일 오후 2시.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주한 베트남 대사관 앞. 십여명의 베트남 여성들이 항의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베트남 아기와 엄마를 집으로 보내주세요’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었다. 알아듣기도 어려운 어설픈 한국말로 기자들 앞에서 자신들의 사연을 소개했다. 몇몇 여성들은 슬픈 감정에 복받친 듯 계속 눈물을 흘렸다. 걸음마를 막 뗀 서너 살 짜리 아이들이 복작대며 대사관 앞 골목을 뛰어다녔다. 글·사진·영상 허재현 기자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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