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1.06.24 16:09 수정 : 2011.06.24 16:36

 학회차 모스크바를 찾아갔다가 어제 돌아왔는데, 모스크바에서 선후배들과의 만남이 많았던 데다가 여러 가지 바쁜 일들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피곤하다 해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것들을 느끼고 돌아왔기 때문에 글을 남깁니다.

 서방 학자들에게 ‘국위선양’을 하고 싶었던 학회 주최 측의 호의로 우리는 모스크바의 중심가에 위치한 고급호텔에 묵었습니다. 호텔 근처의 거리를 걸으면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땅 위에 건널목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죠. 지하보도는 더러 있었지만, 건널목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하보도는 승강기 등의 편의시설이 전혀 없기 때문에 휠체어 등에 의지해야 하는 장애우들이 이용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전체주의 시절에 그곳에 분명히 있었던 건널목이 왜 민주화 이후로 없어졌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오늘날 모스크바는 보행자, 즉 ‘차 없는 서민들’을 위한 도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스크바에서는 차를 가진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의 시민권을 가집니다. 서민들에게 남은 것은 대부분이 1970년대에 생산된, 출퇴근 시간에 서울 지하철 이상으로 붐비는 ‘지옥철’과 갈수록 찾아보기 어려운 (무궤도) 전차들뿐입니다.

 서민들에게 사실상의 시민권이 없는 ‘부자 공화국’ 러시아에서는 부나 권력과 무관하지만 다수의 생존과 진보를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구소련 시절에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푸틴 등 집권 세력의 핵심들도 스스로 인정하듯이, 러시아에서는 교사의 평균 임금은 한화 약 50만원에 불과합니다. (http://www.sptimes.ru/story/33815). 실제로는 비교적으로 가난한 지방의 경우에는 20만-30만원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모스크바만 해도 물가 수준은 서울의 2,3배에 달하는데도 말입니다. 결국, 1950년대의 한국처럼 생계가 곤란한 교사들은 그 부담을 학부모들에게 고스란히 넘겨 각종 ‘무명잡세’를 반강제로 거두거나 ‘투잡생활자’로 변신해 아침이나 저녁에 마트에서 바닥을 닦는 등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무리한 노동으로 만성적 피로에 시달리는 교사, 학생들을 등치는 데에 익숙해진 교사로부터 학생들이 무엇을 배울까요? 신흥 부유층의 자녀야 조기유학을 떠나거나 사립 명문 학교에 다닐 수 있겠지만, 서민층의 자녀는 가면 갈수록 우민화되고 있습니다. 서민층의 1/3 정도는 아예 책을 보지 않는다고 하며, 약 1/3분 정도는 지동설을 믿지 않아 과거 교회의 가르침대로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http://on.msnbc.com/fk1EFc). 한 때 세계 최초로 띄운 우주선을 띄운 이 나라는 이제 ‘중세적인 무지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대학교수들은 교사들에 비해 약 30-40% 정도 높은 급여를 받지만, 근무 여건은 마찬가지로 최악입니다. 제가 만난 러시아에서 대학 교직에 있는 선배들 상당수가 1주일에 10시간에서 12시간가량을 더 강의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잔업을 해야 그나마 먹고살 만한 수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고살 수는 있어도 연구할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구소련 몰락 후 20년간 한국학 분야의 경우에는 <해동고승전>, <용비어천가> 등의 일부 새로운 고전 번역서와 김소월, 김동인, 박완서, 은희경 등의 근현대 문학 번역서가 나왔지만, 새로운 연구 단행본은 극히 드뭅니다. 한국어 문법, 식민지 시대 노동운동사, 공산주의 운동사, 전통시대 민중 저항사, 조선시대 정치사회사 등 구소련 시절 활발히 연구되다가 명맥이 끊긴 ‘현재의 비인기 분야’에는 전문가가 아예 없거나 극소수만 남았습니다. 젊은 학자의 대표적인 학위논문은 한국에서 나온 개설서 몇 종과 해당 분야의 영문 서적 등에서 따온 개략적인 정보를 짜깁기한 것에 불과합니다. 학문이 실종됨과 동시에 구소련 시절의 무상교육도 조금씩 실종돼갑니다. 법적으로는 여전히 무상교육이지만 실제로는 약 60% 이상의 대학생들이 4백~6백만원 이상의 등록금을 냅니다. (http://www.isa-sociology.org/universities-in-crisis/?p=441) 대학이 학문을 쌓기 불가능한 ‘기업’으로 변신함과 동시에 공산 정권 시절에도 살아남았던 교내 민주주의는 다 죽고 말았습니다. 학생들의 권리가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는 것은 물론 교수회의 권력도 실종되었고, 투표로 뽑거나 내보낼 수 없는 극소수 ‘권력자’들이 대학 행정을 도맡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의 부정부패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특히 제 모교인 모스크바국립대에서 1992년 이후부터 군림해온 사도브니치 총장 등 ‘명문대 권력자’의 부정부패 혐의에 대한 보도가 그동안 끊이지 않았습니다. (http://www.compromat.ru/page_9830.htm). 깡패들이 운영하는 불량 기업, 지금 러시아 대학의 모습입니다.

 교육 분야 등 공공부문이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는 모습은 러시아의 종합적인 경제 상황과 직결돼 있습니다. 극소수의 관료와 재벌들을 살찌우는 석유, 가스 등 자원 수출 이외의 경제분야는 여전히 1991년 이후의 위기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며 위축되고 있습니다. 즉, 권력층의 사리사욕에 따라서 러시아 경제가 점차 단순화, 원시화돼 가고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여객기 생산 부문을 볼까요? 몰락 직전 구소련은 전 세계 여객기의 25%를 생산했지만, 오늘날 러시아의 ‘반쯤 죽은 공업’은 한해 15기만 만들어도 풍년이라고 합니다. (2009년 통계: http://en.wikipedia.org/wiki/Aircraft_industry_of_Russia ) 1990년 구소련이 715기의 여객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이제 누가 믿겠습니까? 구소련 몰락과 함께 명맥이 끊긴 컴퓨터 생산은 소생될 조짐은 없고, 정밀기계 분야도 점차 죽어가는 추세입니다. 관료와 재벌들은 원료 수출로 떼돈을 버는 걸로 자기만족을 할 뿐, 복잡하고 단기적인 이윤이 보이지 않는 고급 기술 개발, 생산 부문에 별다른 투자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투자는 눈 앞의 이익에 얽매이지 않는 나라만이 할 수 있는데, 나라가 재벌들과 결탁한 안보꾼 마피아의 포로가 된 뒤로 그 공공성을 완전히 잃고는 ‘집권자의 사리사욕을 채워주는 깡패집단’으로 변신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러시아를 원료나 소비재 장사를 좀 해보겠다는 장사꾼의 시각이 아닌 러시아 국민의 시각으로 본다면, 그나마 구소련의 유산으로 겨우 살아남아 그 유산이 점차 낡아감에 따라서 숨이 끊어져 가는 나라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15-20년 후에, 구소련 시절 배출된 교수, 교사, 의사와 그때 만들어진 공공시설들이 다 사라지고 나면 결국 망국에 가까운 상황이 올 것은 뻔합니다. 러시아를 그나마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은행과 지하자원, 주요 기업들을 사회화하고 국가를 안보꾼들의 마피아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공공기관으로 만들 민중 혁명밖에 없습니다. 이집트 국민이 보여준 길, 어쩌면 오늘날 이집트보다 더 급진적인 길 (이집트의 경우에는 군대의 권력은 여전합니다), 이건 러시아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죽음밖에 없습니다.

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