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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직접민주주의
“1% 위한 대의민주주의 한계”
뉴욕·아테네·브뤼셀 시위대
대표 없는 총회서 의사결정
국가적 차원 청사진 의문에
“시민 참여 정책결정 강화를”
‘월가 점령’(Occupy Wall Street) 시위가 한달째 계속되고 있는 미국 뉴욕의 리버티 플라자 공원(주코티 공원). 이곳에선 날마다 저녁 7시에 ‘총회’가 개최된다. 단상에 올라선 한 ‘연사’가 얘길 했다. “지금 우리의 시위를 전세계 모든 컴퓨터 사용자들이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슬프고도, 예상 가능하게도 북한 사람들만 이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위대는 저마다 ‘인간 마이크’가 돼 그의 말을 크게 따라하며, 뒷사람들에게 전달했다.
이날 열린 총회의 안건은 시위 상황을 전세계로 더 널리 알리기 위해 컴퓨터 장비와 바이오디젤 발전기를 추가로 구입하는 문제였다. 연사의 발언이 끝난 뒤 사람들은 손을 들어 ‘찬성’의 뜻을 나타냈고, 회의가 끝난 뒤 컴퓨터 구입 등을 위한 자발적 모금이 착착 진행됐다. 몇 차례의 수신호를 거쳐 힘겨운 과정이었지만, 결국 모든 사람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1%의 탐욕’에 저항해 전세계 거리로 나선 99%의 보통사람들이 거리에서 ‘직접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다. 보통사람들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하는‘실패한 대의민주주의’를 구하러 나선 것이다.
최근 미국의 독립언론 <인 디즈 타임스>는 이런 월가 시위대의 방식이 긴축 정책에 저항해 거센 시위를 벌였던 지난 7월 그리스의 시위 현장을 닮았다고 전했다. “그리스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가 재현됐다. 수천명의 시위대 중 발언을 원하는 사람들은 번호표를 받아, 제비뽑기를 통해 번호가 호명돼야 단상에 설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 시위대는 시위의 방식이나 국제적 연대 방법 모색, 정부의 부당한 긴축조처에 대한 대안 마련을 논의했다.”
월가 점령 시위의 경우, 지도자가 전혀 없고, 매일 저녁 열리는 총회에서 모든 결정이 이뤄진다.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 <엔피아르>(NPR)의 한 청취자는 “리더가 없는 게 아니라 리더가 많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유럽 99% 저항 운동의 중심에 선 벨기에 브뤼셀의 ‘분노한 사람들’ 시위대도 ‘수평적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분노한 사람들’의 원조 격인 스페인의 ‘15M’(5월15일 마드리드 도심 점거운동) 운동 쪽이나 그들이 일부 참여한 ‘브뤼셀 아고라’에도, 특정한 대표자나 대표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스페인 ‘15M’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델레라 알베로는 “전반적인 일을 맡는 운영자 그룹 같은 게 있지만 그들도 수시로 바뀐다”고 말했다. ‘민중의회’나 인터넷을 통한 의견 수렴과 결정도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이념이 관철되도록 최대한 신경을 쓴다.
이들이 리더나 대표자들을 별도로 두지 않는 것은 현재의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상징성도 지닌다. <인 디즈 타임스>는 “막대한 정치자금 지원을 통해 기업들이 국민의 이해가 아닌 자사의 이해가 반영된 입법을 밀어붙이는 양당 체제의 미국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염증이 월가 점령 시위의 의사결정 방식을 가져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런 무정형과 무방향성 때문에 실질적 결과물 도출이 어렵고, 소규모 집단을 넘어서, 지역적 또는 국가적 차원에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할 청사진을 뚜렷하게 제시하지는 못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시위대 내부에서도 현재 이에 대한 자각과 고민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 시위대가 ‘월가를 점령하라’는 선언적 주장에서 직불카드에 수수료를 물리기로 한 뱅크오브아메리카(BOA) 계좌 폐쇄, 대형은행에서 신용협동조합으로 계좌 옮기기 등 구체적 요구를 도출해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적어도 시위대들이 표출하는 기존 정치시스템에 대한 반감이 정치권에 ‘경고장’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스페인 남부 도시 말라가 지방의회는 ‘15M’ 운동 쪽의 요구에 따라 시민들의 법률안 발의권과 정책 결정 참여권 등을 보장하는 내용의 법률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그들만의 시스템’을 바꾸자는, 조용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뉴욕/권태호 특파원 브뤼셀/이본영 기자,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대안세력 부재…야당 ‘반사 이익’ 가능성 커 각국 정치 후폭풍 맞을까 내달 스페인 총선이 시금석
독일은 녹색당 성장에 기대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전세계로 확산된 이후 스페인이 주요 국가로는 처음으로 오는 11월20일 총선을 맞는 등 각국은 거대한 정치지형 소용돌이로 들어간다. 이어 러시아와 프랑스에서 각각 내년 3월과 4월 대통령 선거가, 미국에선 11월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권의 연임이 걸린 대선과 의회선거가 동시에 치러진다. 중국도 내년 가을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공산당 총서기 자리에서 물러나고 시진핑 국가 부주석으로 승계가 예정되는 등 지도부 교체에 들어간다. 한국 역시 12월에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2013년에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총선을 치른다. 최근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유례없는 ‘근본적 저항’이 일고 있지만, 스페인부터 시작되는 주요국의 선거에서 이를 제대로 반영할 정치지형이 형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선거에선 기존 집권 세력의 고전과 패퇴, 기존 야당 세력들의 반사적 이익으로 그칠 가능성도 농후하다. 이는 유럽 부채위기 국가 중 하나인 포르투갈의 지난 6월 총선 결과가 잘 말해준다. 포르투갈 6월 총선은 좌파 사회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중도우파 사회민주당 연정을 탄생시켰다. 대중들은 부채위기로 초래된 국가재정 긴축과 공공서비스 축소에 불만을 표시했지만, 대안은 부재했다. 오히려 재정 긴축과 공공서비스 축소 등 국제 채권단이 강요하는 구제금융 프로그램에 더욱 충실한 기업인 출신 총리의 중도우파 정권 탄생을 도왔을 뿐이다. 이런 현상은 총선을 앞두고 치러졌던 지방선거에서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주요국의 집권 세력들이 참담한 패배를, 기존 야당 세력들이 반사적 이익을 얻고 있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에 따라 스페인의 11월 총선은 ‘점령 시위’의 전세계 확산 이후 정치지형 변화의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은 월가 점령 시위에 앞서 이미 지난 5월부터 마드리드의 광장을 점령한 ‘분노한 사람들’의 시위로 점령 시위의 불을 댕긴 나라다. 정치 관측통들의 전망은 일단 비관적이다. 영국 <비비시>(BBC)는 정치분석가 미겔 무라도를 인용해 “정치적 움직임은 시위대의 요구와는 반대로 가고 있다”며 “정부와 야당이 시위대들의 요구를 충족한 대책들을 내놓을 것으로 상상할 수 없고, 몇만명이 모인다고 해도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 때문에 이번 세계적 점령 시위는 기존 정치체제의 ‘대의 시스템의 실패’를 드러내는 것이며, 이런 시위 주체들이 “새롭고 민주적인 (대의민주주의 등 기존권력을 혁신하는) 구성권력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제국>의 공동저자인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최근 격월간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 온라인판에서 주장했다. 이번 시위가 다가오는 선거에서 뚜렷한 대안세력을 배출하지 못하겠지만, 기존 정치의 대의시스템과 정치지형 변화를 장기적으로 촉발할 것이란 주장이다.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의 시위구호 중 하나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금 이 자리에”라는 데서 드러나듯, 최근의 시위는 11월20일 총선을 기해 정치의제에 영향을 주는 또다른 장기 시위로 진화할 가능성도 있다고 <비비시>는 전했다. 최근 몇차례 독일 지방선거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하는 녹색당이 비약적 약진을 하고 있는 것은 미약하나마 변화의 흐름을 상징한다. 지난 3월 독일 우파 집권 기민당의 60년 아성인 바덴-뷔르템베르크 지방선거에서 녹색당은 2위를 차지하며 사민당과 연정을 수립해, 기존 정치체제의 장식품이 아니라 대안세력이 될 가능성을 보여줬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 “낡은 것은 사라지고 있지만 새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며 변혁을 위해 ‘시민사회의 진지전’을 주장한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은 이번 전세계적인 ‘점령 시위’에 대한 예언일 수도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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