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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3.30 15:31 수정 : 2012.03.30 15:39

리처드 기어

리처드 기어 이 양반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이곳 다람쌀라에 매년 온다. 달라이 라마와의 개인적인 깊은 관계 속의 스승과 제자의 인연일 것이다. 필자는 여태껏 개인적으로 만나지는 안했지만 매년 보기는 한다. 작년 존자님의 한국인 법회에 와서 함께 자리하니 한국 신도분들 크게 환영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올 부처님 성도지 보드가야에서 열린 깔라차크라 법회장에 와서도 전 과정을 함께 하기도 했다. 서양 영어권 대표 열사람 중의 하나로 나와서 달라이 라마 법좌 앞에서 무릎 꿇고 영문 반야심경을 함께 봉독하니 법회장의 20여만 불자들이 큰 박수로 환호하기도 했다.

이 분이 어느 나라에서나 대환영이고, 출연한 영화도 전 세계에 상영되겠지만 중국에서는 상영 금지다. 2003년인가에 60회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으로 수상될 때 문제가 된 것이다. 알다시피 이 시상식은 전 세계로 동시 중계되는 것으로 안다. 물론 13억 인구의 중국에서도 생중계가 되고 있는 것은 당연. 그날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호명되고는 사회자가 축하의 말과 함께 수상 소감을 묻는데 이거 기상천외의 “한 말씀(?)”이 나와 버린 것이다.

즉, “티벳은 중국으로부터 독립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이 나온 이후 지금까지 중국에서는 리처드 기어가 출연한 모든 영화가 상영 금지로 되어 있다. 티벳에 대한 애정과 달라이 라마에 대한 신뢰나 헌신에서 이런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중국 정치꾼들이 듣기엔 대노할 그런 말이란 게 분명하다.

지금 쓰려는 이야기는 오래 전에 벌어진 일이다. 물론 리처드 기어와 관련된......

어느 한국 아줌마가 이곳에 올라와 오래 묵고 있었다. 그 당시에 한국에서 여기 까지 오는 일만 해도 비행기 사정이나, 델리에서 다람쌀라 구간 버스 사정 등등 쉽지 않던 때이다. 어떤 하는 일 없이 그냥 머물며 여행도 안하고 모든 호텔, 게스트하우스마다 쪽지를 건네주고 있었다. 사연인 즉슨 리처드 기어가 오면 자기에게 바로 알려달라는 간곡한 부탁과 함께 그냥 허름한 숙소에 머물며 그냥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어쩌다 내 방에 와서는 리처드 기어가 언제 오느냐 오면 어디에 묵느냐며 나하고는 전혀 관심 없는 질문을 해댄다. 드디어 서너 달을 기다린 보람인지 기다리던 리처드 기어가 왔다. 아마 그가 묵는 여관에서 한국 아줌마에게 기별이 간 모양이다.

리처드 기어

그런데 문제가 터졌다. 경찰이 올라오고 요란한 사건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알고 보니 자기는 이미 리처드 기어의 부인이라는 것이다. 자기 신의 계시를 받아 이렇게 여기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란다. 꼭 함께 살아야 된다는 신의 계시니까 그리 될 때까지 확답을 받을 거란다. 처음엔 극성팬이 그를 한번 만나거나 사진 한번 찍는 것 정도로 알았다가 매일 와서 “유 아 마이 허스번드(당신은 내 남편입니다.)”라며 고집을 피우니 리처드 기어 측근도 방법이 없어 경찰에 신고까지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나마 그 여자 분의 쓰는 영어란 완전 자기만 아는 엉터리 영어에다가 정숙하지 못한 태도가 주위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때 당시 그 소문은 꽤 우스운 이야기 꺼리로 번져나가며 필자는 같은 한국인으로써 좀 창피했다. 우여곡절 끝에 리처드 기어도 떠났고, 그 한국 여자 분도 떠났다.

그러다가 그 일이 잊혀 질만 할 몇 년이 지났는데, 그 아줌마가 또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처음엔 좀 긴장이 되었지만 이야기를 다 들어주는 자세로 임했다. 듣고 보니 딱 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병원 청소부로 일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여기 올 때도 아는 사람이 대신 자기 일을 하고 있단다. 이젠 리처드 기어를 보러 온 게 아닌, 그 때 소란 피운 뭔가를 보상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전에 신앙을 잘못 이해하여 그리되었다며 후회스런 하소연이다. 지금은 돈 많이 벌어 가난한 인도 사람을 돕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는 불교를 이해하게 되니 참 마음이 편해졌다고도 한다. 참 이런 변화까지 가져왔다니 다행스럽게 보였다. 그 이후는 모른다. 매년 리처드 기어를 볼 때는 항상 그 아줌마가 떠오른다.

이와 비슷한 일이 한국인으로 인해 생기면 왜 그리도 부끄러운지. 한번은 50대 정도의 남자분이 통역한다는 일행 두 분과 함께 들어와서는 곳곳에 대단한 광고 전단 벽보를 붙이고 다녔다. 내용은 일단 모여라, 오면 뭘 주겠고, 내 법문을 들어보라는 황당한 소문이 일고 있었다. 막상 그날 거기에 가서는 웃어야 할지 어쩔지 참으로 민망 했다. 모인 사람들에겐 20루삐(당시 한화 약 천 원정도)씩 누구에나 나눠주고 하는 말이라니 가관이다. 자기는 깨달은 여래(부처)란다. 또 이곳 달라이 라마는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등등 참 듣기 민망했고, 이후 얼마간 이곳 스님들한테 필자는 엉뚱한 놀림감으로 전락 되어버렸다. 그 꼬리아 자칭 부처는 어디로 갔냐며 놀리는 것이었다.

해외에 나와 살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그러면 내가 애국자인가? 필자는 이 말 앞에서는 망설여지며 발언권이 없다. 일평생 74년 유신 찬반 투표를 군에서 강제로 이행한 이래로 어떤 투표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 이런 것을 볼 때 필자는 우리 조국을 사랑해도 애국자는 못 된다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제 의무로써 투표를 하겠다는 의지로써 정식으로 델리 주재 한국 대사관에 신청해뒀다. 그냥 멀리서 무관심으로 두고만 본다는 게 바르지 않음을 이번 정권에서 크게 그리고 부끄럽게 느꼈기 때문이다. 이젠 나라일의 투표에 나설 것이다.

2012년 천축국 다람쌀라에서, 청 전 두 손 모읍니다.

[휴심정] 십자가 안 세운 교회 카페처럼 도서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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