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5.29 21:09
수정 : 2012.05.29 21:55
안보리서 ‘시리아 제재안’ 거부했다
유엔 현지조사단 설명에 태도 바꿔
실리 추구 ‘푸틴식 외교’ 관심 집중
시리아 훌라에 사는 11살 소년은 26일 새벽 가족이 몰살당하는 장면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 새벽 3시께 문을 두드려 안으로 들어온 무장한 남자들은 기관총으로 엄마와 5살 여동생, 아빠, 삼촌을 차례차례 모두 죽였다. 그는 총을 맞지 않았지만 얼굴에 다른 식구들의 피를 묻힌 채 엎드려 있어 살 수 있었다. 영국 <가디언>의 기자가 그 사람들이 누군지 아느냐고 묻자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왜 그렇게 묻는 거죠? 저는 당연히 그들이 누군지 알아요. 모두가 다 알죠. 그들은 정부 친위부대예요. 그건 사실이에요.”
애초 러시아는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발표한 ‘훌라 학살’ 규탄 성명 채택을 거부했다. 학살을 누가 저지른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유엔 현지조사단의 설명을 듣고 나서 결국 태도를 바꿔 성명에 찬성했다. 이것이 사사건건 국제사회의 시리아 정부 제재에 딴죽을 걸던 러시아의 태도가 바뀌고 있다는 단초가 될 수 있을까?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28일 ‘전세계는 러시아가 아사드를 지지하는 것을 그만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지난 26일 어린이 49명을 포함해 108명이 죽은 훌라 학살 뒤 시리아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비등하지만 여전히 바샤르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하고 있는 러시아를 겨냥한 기사다.
러시아는 지난해와 올해 2월 두차례나 유엔 안보리에 상정된 시리아 제재안에 중국과 함께 거부권을 행사했다. 유혈사태에 아사드 정부와 반정부 세력 모두에 책임이 있으며, 외부의 개입은 내부 권력투쟁에서 한쪽 편을 들어주는 것이라는 점을 이유로 내세웠다. 하지만 속셈은 오랜 기간 러시아의 맹방이었던 아사드 대통령에 대한 지원에 가깝다. 시리아는 2010년 러시아로부터 11억달러어치의 상품을 사준 주요 수입국인데다, 러시아의 유일한 지중해 연안 해군기지가 시리아 타르투스에 있을 만큼 군사적으로도 러시아에 적극 협력해 왔다.
하지만 최근 러시아의 시리아에 대한 태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가디언>은 이달 블라디미르 푸틴의 대통령 취임 이후 철저하게 외교적 실익만 따지는 ‘푸틴식 외교’가 시작됨에 따라 시리아 문제에 대한 접근도 달라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 외교의 발등에 떨어진 제1 당면과제는 미국과 유럽의 미사일방어체제에 대한 대응과 중앙아시아 문제 해결이다. 다음달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을 앞둔 상황에서 우선순위가 다소 뒤에 있는 시리아 문제로 발목 잡힐 짓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시리아가 내전 상태에 접어드는 것보다는 예멘처럼 정권을 내놓는 방식이 더 러시아에 이익이 된다는 계산을 할 수도 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이형섭 기자
sub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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