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0.15 16:14
수정 : 2012.10.15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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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로돔 시아누크 전 캄보디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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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누크 캄보디아 전 국왕 사망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왕위 올라
일본·프랑스 등에 맞서 독립 투쟁
미국 주도한 쿠데타로 축출되기도
크메르루주 집권뒤 연금·자살시도
북 김일성·중 마오쩌둥과 친분도
동남아 현대사의 최대 증인 노로돔 시아누크 전 캄보디아 국왕이 15일 8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중국 베이징의 한 병원에 가료중이던 시아누크 전 국왕이 이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그의 보좌관이자 친척인 시소와스 토미코 왕자가 발표했다.
1941년 왕위에 오른 시아누크는 사망하기까지 70년 이상 동안, 두 차례의 국왕 즉위를 포함해 대통령, 총리, 국가수반, 망명지도자, 상왕 등을 거치며 캄보디아뿐만 아니라 동남아 현대사를 온몸으로 돌파한 현실 정치인이었다. 그는 2차대전 때부터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전역에 몰아친 식민과 독립, 열전과 냉전, 혁명과 반혁명, 쿠데타와 내전, 전쟁과 협상, 학살과 화해 등 상상가능한 모든 정치적 격변에서 때론 주역으로, 때론 패배자로, 종국적으로 중재자로서 일생을 살아왔다. 그는 이 과정에서 주변 강대국은 물론이고 국내 정치세력을 상대로 동맹과 투쟁, 연대와 배신을 번갈아 가며 결국 협상으로써 약소국인 조국 캄보디아의 독립과 자주를 지키려 했다.
1922년 캄보디아 왕족의 한 집안인 노로돔 가문의 큰 아들로 태어난 그는 당초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석권하자, 캄보디아를 통치하던 프랑스 식민당국은 그를 1941년 전격적으로 꼭두각시 왕위에 올렸다. 외할아버지인 국왕이 사망하자, 아버지를 제치고 18세 나이로 그가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다. 주변의 예상을 깬 정략적인 그의 왕위는 향후 그의 일생에 대한 예고편이었다. 그는 여러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13명의 아들을 낳는 등 향락적인 생활을 하며, 프랑스의 기대대로 꼭두각시 왕으로 지내는 듯 했다. 하지만, 일본이 캄보디아를 점령하자, 전격적으로 캄보디아 독립을 선포하고, 또 일본이 패배하자, 프랑스 식민당국의 귀환을 환영했다.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전에서 패배가 확실해지자, 그는 프랑스를 설득해 1953년 11월 캄보디아의 독립을 얻어낸다. 그의 첫번째 외교 승리였다.
독립 뒤 왕위에서 물러난 그는 인민사회주의공동체라는 정당을 창설해, 첫 총선을 석권하고 일당통치 정부에서 대통령, 총리, 외교장관을 겸임하는 ‘자애로운 전제군주’로 군림했다. 그의 황금기였다. 그는 당시 냉전 상황에서 제3세계 비동맹운동의 한 주역으로 활약하며, 캄보디아를 한 강대국의 일방적 세력권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60년대 이후 가열되는 베트남전은 그와 캄보디아를 집어삼켰다. 북베트남은 캄보디아 영내를 병참수송로로 활용했고, 미국은 론놀 장군을 사주해 베트남전에 비협조적이던 시아누크를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베이징으로 망명한 시아누크는 이후 영욕이 교차하는 고단한 삶을 산다. 그는 자신이 탄압했던 공산세력인 폴포트의 크메르루주의 명목상 지도자가 되어, 1975년 론놀 친미정권 타도에 큰 힘이 된다. 크메르루즈 집권 뒤 캄보디아의 명목상 대통령이던 그는 1년만에 사임하고, 사실상 연금상태에 처한다. 170만명을 집단학살한 크메르루즈의 만행을 들으면서 그는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크메르루즈 정권을 타도했으나, 그는 크메르루즈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 캄보디아의 베트남 속국화를 우려한 그는 베이징을 거점으로 하여,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12년 동안의 그의 외교활동에 힘입어 캄보디아는 1991년 결국 유엔 중재로 종전협상을 타결짓고, 2년 뒤 총선을 실시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다. 그는 캄보디아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첫 총선에서 아들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가 이끄는 정당이 압승하자, 실력자 훈센은 내전 재발을 협박했다. 이에 시아누크는 아들에게 공동총리제를 설득해 훈센에게 사실상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후에도 캄보디아 정파들의 중재로 활약하다가, 2004년 건강문제로 아들 시하모니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상왕으로 물러앉고 대부분을 베이징과 평양 등 해외에서 보냈다.
그는 서방 문화와 동양 왕실 문화에 물들은 국제 외교가의 대표적 호사가였다. 프랑스 와인과 음식 애호가로 그가 주선하는 연회는 당시 외교가의 대표적 사교장이었다. 6번 결혼하고 적어도 14명의 자식을 둔 그는 색소폰 연주가, 작곡가, 영화제작자이자 감독으로도 활약했다. 자신의 향략적인 생활에 대해 그는 “캄보디아 인들은 나를 포함해 모두 버릇없는 자식들이다”라는 농담으로 일축하기도 했다.
그는 영욕이 얽힌 자신의 삶에 대해 “비극의 주인공은 시아누크가 아니라 캄보디아 인민이다”라는 말로 갈음했다. 조국을 보전하려는 약소국 지도자로서의 최대치와 그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 그의 일생에 대한 평가였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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