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3.07 19:43
수정 : 2013.03.07 22:39
베네수엘라 카라카스를 가다
그는 웃었지만, 그들은 울었다.
대형 전광판에 비친 화면 속에서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암 투병으로 머리를 빡빡 민 채 환하게 웃는 모습이 비쳤다. 다시 지지자들이 흐느꼈다. “죽었으되 베네수엘라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할지어다.” 추모식 진행자의 목소리는 떨렸다. “누에스트로 코만단테(우리들의 최고 사령관)” “누에스트로 코만단테”. 지지자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베네수엘라는 우고 차베스 대통령을 영원히 떠나보내기 앞서 추모식을 밟고 있었다.
칠레에서 파나마를 거쳐 9시간여 만에 도착한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6일 오후(현지시각) 군사학교 앞 인데펜덴시아 거리부터 급하게 찾았다. 물밀듯 넘쳐나는 붉은색 옷과 모자, 깃발의 행렬이 한편에서 돌아 나왔다. 청년들과 아이의 손을 잡은 부부, 60~70대가 뒤섞였다. 몇몇은 베네수엘라 국기를 등에 둘렀다. 거리는 울려대는 오토바이 경적 소리가 귀를 찔렀다. 오토바이 뒤에 탄 동료는 깃발을 흔들었다. 한쪽에 군인과 경찰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멀리 군사학교 앞 대형 조기가 펄럭였다. 주검은 군사학교 안으로 옮겨진 뒤였다. 이날 오전 국군병원을 떠난 차베스의 주검은 수십만명의 지지자 행렬과 함께 오후 5시께 군사학교에 도착했다. 군사학교 안에 들어가지 못한 수천명은 밖에서 멍하니 전광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운구를 동행한 이들에겐 논쟁의 대상인 차베스가 “영원한 최고 사령관”이었다. “진정한 지도자를 잃었다는 게 너무 슬퍼요.”(호세 타바라, 35) “억압받던 우리들을 위해 산 유일한 대통령이에요.”(아나 가야르도, 63) “남미 독립영웅 시몬 볼리바르 이후 첫 21세기의 해방자였어요.”(하미로 비예가스, 37) 그래서 여러 지지자들은 차베스가 볼리바르의 유해가 묻힌 판테온 나시오날에 같이 안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차베스가 헌법을 고쳐 4선에 올랐지만 독재자라는 비판에는 목소리를 높였다. “독재자를 국민이 어떻게 네번이나 대통령에 뽑아줘요?”(호세 타바라) “독재자가 아니라 신이 보내준 지도자예요. 정말 독재자였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추모하려고 모였겠어요?”(리카르도 고데프로이, 33) “가장 가난한 자들에게 필요한 혜택을 주는데 반대세력은 독재라고 비난했어요.”(마르틴 비예가스, 38)
티브이에서는 밤늦도록 삼색 국기가 덮인 차베스의 관과 붉은색의 추모 행렬, 차베스의 생전 모습이 이어졌다. 지지자들은 통곡하고, 서로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2010년 <한겨레> 기자로 남미 독립 200년을 맞아 취재했던 카라카스 거리엔 볼리바르의 초상이 가득했다. 차베스는 그토록 제2의 볼리바르를 꿈꿨건만, 3년 만에 찾은 그곳에서 그는 관 속에 누워서조차 볼리바르 같은 ‘모든’ 국민의 영웅은 아니었다.
슬픔에 넘치는 추모식장이나 티브이 화면과는 또다른 현실이 카라카스엔 있다. 신호등에 걸린 자동차들 앞에서는 한 청년이 곤봉 묘기를 부리더니, 동전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외국에서 기자들이 많이 와서 호텔 방이 없다”고 공항 안내소에서 들었지만, 어렵지 않게 와이파이가 되는 방을 잡았다. 택시 기사는 공식 환율보다 2배로 쳐주겠다며, 환전소 대신 자신과 미국 달러를 바꾸면 얼마나 이익인지 정신없이 숫자를 늘어놨다. 차베스에 대해 묻자 “암 걸려서 죽을 날만 기다렸잖아요. 있는 사람 것 빼앗아 없는 사람한테 거저 주는 게 맞나요? 범죄 때문에 살기가 얼마나 불안한지…”라고 답했을 뿐이다. 한 70대 노인은 “정치에 관심 없다”고 말했다. 스페인어판 <시엔엔>(CNN) 채널에서는 차베스가 집권 기간 10배로 뛴 고유가 덕을 봤다는 보도를 내보낸 뒤 전문가들의 논쟁이 이어졌다.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에는 장갑차도 중무장한 군인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2013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형 펼침막이 천장에 길게 내걸렸다. 그 옆으로 차베스 대통령이 아이들과 함께 활짝 웃는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함께 계속하자”며.
이날 추모식에는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 등이 참석했다. 차베스의 장례식은 8일 주변국 조문단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군사학교에서 치러진다.
카라카스/김순배 통신원, 칠레대 박사과정
otromundo7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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