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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혁명’의 발원지인 베네수엘라 과레나스의 정자나무 앞에서 11일 두 노인이 시위가 벌어졌던 곳을 가리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우고 차베스는 시내 한 가운데에 있는 이 정자나무를 보존토록 지시했고, 지난해 대선 막판에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과레나스/김순배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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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카라카스를 가다 ④
1989년 ‘버스값 시위’ 혁명 주춧돌넘치는 석유로 주민들에 투자
집권시기 극빈율 70% 가까이 줄어 외국인 “21세기 사회주의 일장춘몽”
‘14년 반미’에도 달러의 힘은 여전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시내 곳곳은 낡고 찌들고 허물어졌다. 11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차로 25분 만에 도착한 소도시 과레나스의 한 상인은 “이곳이 혁명이 태어난 곳”이라고 말했다. 1989년 2월27일 경제위기를 맞아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처방에 따라 휘발유 가격을 30% 인상했고, 카라카스행 버스삯도 덩달아 “2배 가까이 뛰었다”. 주민들은 터미널의 버스 창문을 부쉈다. 그리고 ‘사만’(정자나무)으로 몰려들었다. 치솟은 가격에 물건을 파는 그 옆 상점을 약탈했다. 시위는 카라카스로 번졌고, 군의 진압으로 300명(공식 발표)~3500명(비공식 집계)이 숨졌다. 시위 ‘카라카소’가 벌어지던 베네수엘라는 2배로 뛴 버스삯을 낼 수 없는 이들의 편에 설 지도자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92년 2월, 중령 우고 차베스는 나라를 뒤집어엎으려 쿠데타를 일으킨다. 차베스가 과레나스의 길 한가운데 사만을 보존하도록 지시한 것도, 지난해 대선 막판 이곳을 방문한 것도 그런 의미가 있었다. 카라카소 24년 뒤인 11일도 과레나스 터미널은 매연을 뿜는 낡은 버스들이 수없이 드나들었다. 호세 론돈(56)은 날마다 카라카스행 버스를 탄다. 론돈은 “새벽 5시에 버스를 타고 가서 일하고 돌아오면 밤 10시”라고 말했다. 론돈은 이렇게 해서 한달에 3000볼리바르를 번다. 카라카스행 버스값이 9.5볼리바르이니 3000볼리바르로는 생활비 대기에 턱없이 모자라는 돈이다. 그래도 이제 론돈에게 희망이 생겼다. 아내 솔 오수나(42)가 차베스가 세운 대학에서 무료로 공부를 마치고 곧 유치원 교사로 일할 예정이다. 차베스가 2002년 4월 기득권 세력과 일부 군부의 쿠데타 기도로 실각했을 때, 과레나스 주민들은 과거로 돌아가기 싫었다. 그들에게 “차베스의 잘못은 처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편을 든 대통령이라는 것뿐”이었다. 주민들은 다시 사만으로 몰려와 시끄럽게 냄비를 두드리는 ‘카세롤라소’ 시위를 벌였다. “차베스를 석방하라.” 군부는 사흘 만에 차베스를 대통령궁에 돌려놨다. 사만 옆에서 선불전화기를 충전해주는 이사벨 가르시아(40)는 “우리에게는 한 방울도 돌아오진 않던 석유를 차베스는 우리 모두에게 한 방울씩 나눠줬다”고 말했다. 그가 조문을 다녀온 이유다. 론돈이 차를 살 돈만 있다면, 기름값 걱정은 없다. 한가득 채워도 5~6볼리바르다. 100년은 먹고산다는 석유 매장량이 3천억배럴에 이른다. ‘카라카소’ 이후 기름값은 “인토카블레”(손댈 수 없다는 뜻)로 저소득층에 몇 안 되는 낙이다. 한 한국인 사업가는 이렇게 말했다. “차베스는 바보다. 세계에서 기름이 가장 많이 묻혀 있는데, 투자로 부가가치를 만들고 경제가 돌아가게 해서 나라를 성장시키지 않고 ‘똥값’에 팔았다. 떡만 주고 떡 만드는 방법을 안 가르쳐줬다.” 하지만 과레나스 주민들의 내일을 위한 투자는 달랐다. 그곳에는 카라카스를 오가는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었다. 차베스의 집권 기간에 값이 10배 오른 원유와 국내총생산(GDP)의 약 20%로 추정되는 재정적자가 론돈의 아내를 교육시킨 재원이다. 집권기간 극빈율은 70% 가까이 줄었고, 문맹률은 2010년 5%로 라틴아메리카 평균 9%보다 큰 폭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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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배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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