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사람들을 해치지 마세요.”
15일(현지시각) 보스턴 마라톤 테러 현장에서 숨진 8살 소년 마틴 리처드가 1년 전 사진으로 남긴 ‘평화의 메시지’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언론을 통해 퍼지며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어른들의 폭력으로 삶을 빼앗긴 소년은, 서툰 손놀림으로 정성껏 눌러쓴 다섯 단어를 ‘평화의 유산’으로 남겼다.
미국 <시엔엔>(CNN) 방송 등 외신은 16일 마틴의 담임교사 레이철 무가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한장을 보도했다. 사진 속에선 마틴이 ‘더이상 사람들을 해치지 마세요 ♥평화♥’(No more hurting people ♥Peace♥)라고 쓴 종이를 들어 보이며 해맑게 웃고 있다. 무 교사는 “지난해 행사에서 찍은 사진”이라며 제자가 남긴 ‘뜻’을 기렸다. 지난해 5월 학교에서 주최한 ‘평화 걷기’ 행사에서 마틴은 손수 만든 이 손팻말을 들고 도시를 돌며 평화를 촉구했다. 무 교사의 친구인 루시아 브롤리는 마틴의 사진 아래 댓글을 남겼다. “우리 모두가 마틴의 말처럼 살도록 기도한다”는 그의 바람은 이번 테러에 놀란 지구촌의 염원과도 같았다. 보스턴 남부 도체스터의 애시몬트에 있는 마틴의 집 진입로에도 누군가 분필로 ‘평화’라는 단어를 적었다.
미국 언론들은 사건 첫날 마틴이 아버지인 윌리엄의 마라톤 완주를 축하해 주려다가 참변을 당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유가족 대표는 “아버지는 마라톤 관중이었다”고 공식 정정했다. 마틴과 함께 있다가 다친 어머니는 뇌 수술을 받았고, 6살 여동생은 다리를 잃었다.
이런 엄청난 비극 앞에서 윌리엄 리처드는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가족과 친구들, 아는 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분 등 우리를 생각하고 기도해 준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다만 “우리가 슬퍼하고 회복되는 동안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부분에는 인내를 부탁드린다”며 지나친 관심을 자제해달라고 당부했다.
마틴이 다니던 학교와 이웃에게도 소년의 죽음은 큰 충격과 슬픔이었다. 네이버후드차터 초등학교는 성명을 내어 “마틴은 총명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소년이었고, 미래에 대한 큰 꿈과 높은 이상을 가졌다. 우리는 마틴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다”고 밝혔다. 마틴의 집 앞에는 이웃과 추모객들이 놓고 간 꽃과 테디베어 인형이 쌓여가고 있다.
세계 언론에 포착된 ‘참사의 순간’은 마틴 말고도 여러명의 ‘테러 속의 영웅들’을 탄생시켰다. <보스턴 글로브>의 ‘노인 마라토너’ 사진(<한겨레> 17일치 1면) 속 빌 이프리그(78)가 화제의 중심에 섰다. 사진 속에서 이프리그는 첫 폭발의 충격으로 뒤로 넘어져 있고, 경찰관과 진행요원 등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멀리 두번째 폭발 장면이 잡혔다. 그가 폭발 이후 다시 일어나 1.5m를 더 달려 결승선을 통과한 사실이 알려지며 희망과 용기의 표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아들 마크는 “아버지 사진을 보고 한동안 멍했다. 끔찍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우보이모자를 쓴 남자’ 카를로스 아레돈도(53)는 영웅이 됐다. 트레이드마크가 된 모자를 쓴 그가 폭발 뒤 혼란 속에서 생면부지의 제프 바우먼(27)의 옆을 지키는 모습이 <에이피>(AP) 통신 카메라에 잡혔다. 아레돈도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제프의 티셔츠가 불에 타자, 손으로 불을 껐다. 자신의 옷을 찢어 무릎 아래가 사라진 제프의 다리를 지혈하기도 했다. 그러곤 죽음 직전의 위기 앞에 넋을 놓은 제프가 구급차로 옮겨질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아레돈도는 2004년 이라크전에 참전한 아들을 잃은 아픔이 있다. 그는 사고 이후 수년간 보스턴 마라톤에서 성조기를 나눠주며 아들을 기려왔다. 제프의 아버지는 <뉴욕 타임스>에 “카우보이모자를 쓴 남자가 제프의 목숨을 구했다”고 말했다. 코스트코 푸드코트의 직원인 제프는 두 다리를 잃었다. 16일, 그는 목구멍에 호스가 삽입돼 말문이 막힌 채 입모양으로 “쾅! 쾅!”을 외치고 팔을 허우적대며 병원 침대에서 눈을 떴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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