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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29 20:21 수정 : 2013.08.30 11:46

칠레 좌파 연합 ‘누에바 마요리아’의 미첼 바첼레트 대선후보의 선거홍보물이 산티아고 시내 마누엘 몬트 거리의 한 건물 옥상에 세워져 있다.

칠레 11월17일 대선…좌·우파 여성후보 격돌

칠레대 본관의 제법 큰 서점에도 찾는 책은 없었다. 며칠 뒤 시내에서 가장 큰 서점 가운데 한곳에서 “마지막 남은 한권”을 샀다. 7월에 처음 출간된 뒤 한달 만에 나온 2판이다. 기록적 판매량을 올리며 8월23일 기준 논픽션 분야 베스트셀러 1위다. 책 제목은 <엘 오트로 모델로>(다른 모델)이다. 페르난도 아트리아 칠레대 법대 교수 등 5명의 저명한 진보적 학자들이 썼다.

칠레가 다른 사회모델로 가야 한다는 게 책의 핵심 메시지다. 부제목이 잘 알려준다.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공공의 체제로”. 이 책이 이렇게 선풍을 일으키는 이유는 11월17일 대선과 총선 동시 선거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좌파연합 ‘누에바 마요리아’의 대선 후보인 미첼 바첼레트 전 대통령이 7월18일 출판 기념회에 직접 참석해 이 책을 소개한 데서 보듯, 이 책에선 바첼레트가 구상하는 칠레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좌파연합 후보 바첼레트 재선도전
“독재잔재 청산, 사회 갈아엎겠다”
대학 무상교육·법인세 증세 등 공약

우파연합 ‘여성대결’ 마테이 내세워
OECD국 ‘최악 불평등 사회’ 불구
“신자유주의 모델 지속” 내걸어

여론조사 “바첼레트 당선” 77%
바첼레트 ‘사회개혁 모델’ 실현여부
범좌파 총선 득표 의석수에 달려

이번 칠레 대선에는 역대 최대인 9명의 후보가 출마했지만, 사실상 여성 후보 간의 양자 대결 구도다. 각각 좌파와 우파 후보로 나온 두 여성 후보의 상반된 상징성은 모두 공군 장성이자 친구였던 이들 아버지들의 과거사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미첼 바첼레트의 아버지는 군사정권의 쿠데타 참여 요구를 거부한 뒤 고문으로 숨졌다. 그 시절, 집권 우파연합 ‘알리안사’의 대선후보 에벨린 마테이의 아버지는 보건장관과 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바첼레트가 사회당 소속인 반면 마테이는 피노체트 측근과 그 후손이 승승장구하는 독립민주연합(UDI) 소속이다. 1973년 9월11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가 무너진 지 40년을 맞은 올해, 대선은 그 역사의 맞대결이다.

애초부터 여성 후보 간 대결이었던 건 아니다. 칠레 집권당은 파블로 롱게이라(UDI) 전 경제장관을 우파연합 후보로 6월30일 공식 선출했다. 그런데 그가 우울증 등 건강 악화를 이유로 7월17일 전격 사퇴했다. 유력 대선주자이던 로렌스 골본 전 장관이 부패 스캔들로 물러나 롱게이라가 후보로 나선 지 3개월도 안 된 상태였다. 이런 사태를 보며 많은 칠레인들은 “코미디!”라며 코웃음을 쳤다. 막강한 야권 후보 앞에서 자멸하던 우파가 꺼낸 게 ‘여성 대결’ 카드다. 이렇다 보니, 벼락 후보가 된 마테이는 선거를 불과 석달여 앞둔 지난 13일 “한달 안에 최종 공약을 내놓겠다”고 발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마테이의 선거 누리집은 세부 공약은 없이 사진과 연설문만 올려놓고 있다.

칠레 우파 연합 ‘알리안사’의 에벨린 마테이 대선후보의 선거 홍보물이 남미 최고층 빌딩인 산티아고 시내 코스타네라센터 인근에 걸려 있다.

여성 간 대결이라 흥미로울 듯하지만, 승부가 뻔하니 선거판은 달궈지지 않는다. 바첼레트는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우위다. 7월 말 라디오 <코오페라티바> 등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76.9%가 바첼레트가 당선될 것으로 예상했다. 마테이가 당선될 것이라는 답변은 20.5%에 그쳤다. 마테이가 “준비가 잘 안됐다”(20.2%)거나 “거의 준비가 안 됐다”(45.7%)는 답변이 민심을 드러낸다. 6월30일 치러진 진영별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은 실제 선거판의 풍향계다. 우파 지지자는 80만명이 참여한 반면, 좌파 지지자는 213만명이 참여해 좌파 경선후보 가운데 바첼레트에게 73%의 압도적 표를 몰아줬다. 우파 진영의 현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의 지지율도 30% 초반에 머물러 마테이에게 도움이 안 된다.

이렇다 보니, 바첼레트는 “여자 두 명이 출마하자 여자 간의 대결이라고 하는데, (남자들만 출마하는) 대선을 남자 간의 대결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성차별에 대한 거부이자, 상대가 안 되는 후보를 같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양대 여성 후보 간 대결로 모는 프레임에 대한 거부다.

그러니 여성 간 대결보다 더 주목할 것은 바첼레트가 내건 모델이다. 마테이가 피노체트의 유산인 신자유주의 모델의 지속을 상징하는 반면, 바첼레트는 사회구조 개혁을 가로막는 헌법상 군사독재의 잔재를 뜯어고쳐 ‘사회를 갈아엎겠다’고 외치고 있다. 바첼레트의 이런 의지는 대학 무상교육, 개인소득세 감면 및 법인세 증세, 국영 연금 운영사 설립, 소수 세력의 의회 진출을 막는 ‘다수 2석제’(Binominal) 폐지 공약 등에 반영돼 있다. 보수파들은 “(바첼레트가 이전보다) 더 빨간색이 됐다”고 색깔론 공격을 한다. 하지만 바첼레트는 <엘 오트로 모델로> 출판기념회에서 “지금과 같은 발전 모델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수많은 문제를 드러낸 모델을 조금씩 고치며 맴도는 데 지쳤다”며, 공공의 문제를 시장에만 맡기는 게 아니라 국가와 시민이 중심에 서는 공공의 모델을 통한 구조적 개혁을 강조했다.

(※클릭하면 이미지가 커집니다.) 칠레 대선 양대 후보 비교

칠레에서 새로운 모델이라는 말만큼 매력적인 단어도 없어 보인다. 민영화된 전기·가스·상수도의 요금은 소득 수준에 비해 턱없이 높다. 이달에 수도요금 1만4700페소(약 3만2200원), 전기요금 2만2800페소가 나왔다. 보일러를 1주일에 2~3일, 가족이 “춥다, 추워” 하면 겨우 2~3시간씩 켜고 겉옷까지 입고 살았는데도 가스요금이 9만2583페소가 나왔다. 수도와 전기세를 인터넷에서 내려 들면, 어느 회사인지 고르라며 주르륵 이름이 뜬다. 국민연금도 민간에 맡겨져, 자기 회사로 옮기라는 광고가 신문에 수두룩하다. 의료보험이 없는 한국 연수생은 목이 아파 사립병원에서 진찰을 받고서 3만5000페소를 냈다. 공립병원은 ‘수술받기 전에 기다리다 죽는다’는 조롱을 받는다. 국립대학인 칠레대의 사회과학 박사과정 올 한해 등록금으로 340만페소를 납부했다. 이달 초 8.8% 오른 최저임금이 월 21만페소, 2011년 평균임금이 월 39만365페소인 나라인데 말이다. 7월20일치 일간 <엘 메르쿠리오>에 따르면, 대학 신입생 가운데 장학금이나 학자금 대출을 받지 못한 21.7%가 1년 뒤 학교를 그만둔다. 서점에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란 책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칠레 대학생 시위를 이끈 학생 지도자 가운데 한명이 쓴 책이다. 그만큼 지금 칠레의 현실은 현 모델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 갈망이 2011년 학생시위로 터져 나온 뒤 올해 선거라는 제도화의 시기를 맞은 셈이다.

<엘 오트로 모델로>는 24쪽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현 칠레의 정치경제사회 모델은 독재정권에 의해 1976~1990년 급진적인 신자유주의 형태로 설계된 뒤 중도좌파연합(콘세르타시온) 20년 집권 기간에 완화돼 왔으나 충분하지 않으며 대안을 만드는 게 절박하다.” 이 책이 밝히듯, 중도좌파는 피노체트 이후, 현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 집권 전까지 20년간 권력을 잡고도 사회구조적 변화를 이뤄내지 못했다. 특히 신자유주의 모델의 지속은 칠레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악의 불평등 사회로 만든 주요 원인이다. 진보적 싱크탱크 ‘칠레 21’의 글로리아 데 라 푸엔테 정치국장은 “바첼레트 집권(2006~2010년) 당시 주변에는 보수적인 경제 참모가 많았고, 지금 바첼레트가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지만 참모진 사이에 생각이 달라 긴장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니 문제는 바첼레트의 당선이 아니라, 당선 뒤 그 모델이 얼마나 실현되느냐다. 나이 지긋한 한 택시기사는 “대통령으로 있을 때는 안 하더니 이제 와서 온갖 문제를 현 정부 책임으로 돌리며 전부 바꾸겠다고 하나?”라고 바첼레트를 비난했다. 대학 무상교육 등의 예산은 어디서 나오느냐는 비판도 따른다. 보수 일간 <엘 메르쿠리오> 8월7일치에 실린 “바첼레트: 선동정치의 약속”이라는 비난성 칼럼이 반대 세력의 이런 정서를 보여준다.

바첼레트 모델의 실현은 ‘누에바 마요리아’가 총선에서 얼마나 득표해, 바첼레트의 개혁에 얼마나 의회의 힘을 싣느냐에 달려 있다. 바첼레트는 기존 중도좌파연합에 공산당까지 참여시켜 ‘누에바 마요리아’를 내걸고 흩어진 범좌파의 결속을 노리고 있다. 선거 캠페인에서도 “의회에서 절대다수를 만들어줘야 사회 틀을 바꿀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델이 얼마나 실현될지 미지수다. 중도좌파연합은 현재 의석의 절반 수준을 가지고 있는데, 각종 핵심 법률 개정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의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하기는 쉽지 않다. 옆집 할아버지는 마테이를 찍겠다며 “2부는 좋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4년 만에 재선을 앞둔 바첼레트의 1부보다 나은 2부를 보고 싶다.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는 여성 대통령을 보는 것은 칠레인만의 꿈은 아니니 말이다.

산티아고/글·사진 김순배 통신원 otromundo79@gmail.com


카밀라 바예호

‘공교육 강화 학생시위 주도’ 25살 바예호, 하원의원 도전
주목받는 제3의 여성

올해 칠레 선거 국면에서 주목받는 제3의 여성이 있다. 2011년 공교육 강화 등을 요구하며 학생시위를 이끈 카밀라 바예호(25·사진)다. 2011년 당시 영국 일간 <가디언>이 올해의 인물로 뽑을 만큼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바예호는 11월 선거에 자신이 성장한 산티아고 남동부 플로리다의 하원의원 후보로 나섰다. 공산당(PC) 소속으로, 좌파연합의 협상 끝에 경선도 없이 후보로 확정됐다.

이번 바예호의 연합공천은 ‘누에바 마요리아’의 좌파 진영 후보들에 대한 직간접 지원 속에 이뤄졌다. 다른 학생시위 지도자 카롤 카리올라, 조르조 잭슨 등도 공천을 받았다. 이들이 출마하는 지역에는 누에바 마요리아 후보들이 출마하지 않는다.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고, 청년 유권자를 겨냥하는 포석이다. 이들 학생시위 지도자 출신 후보들은 당선권에 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바예호는 임신 8개월이어서 불룩하게 배가 나왔지만, 코걸이를 한 사진을 선거 캠페인에 쓰고 있다. 그는 “사회운동의 요구는 정치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단기간에 답을 얻을 수 없다”며 “사회적 압력을 유지하며 제도권 안에서도 바꿔나가야 한다”고 의회 도전에 나서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2011년 학생시위 당시 자신이 강하게 비판한 바첼레트를 이번 선거에선 지지하는 데 대해 “우리를 저버린 너를 잊지 않겠다”는 글이 떠도는 등 비난도 뒤따른다. 이에 대해 최근 바예호는 “당시 시위는 바첼레트 개인이 아니라 교육시스템을 겨낭한 것이었다”며 “당시의 생각을 이어가고 있으므로, 배신이나 모순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산티아고/김순배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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