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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1.17 20:56 수정 : 2013.11.17 22:47

한국인 이주 150년사

‘디아스포라’는 슬픈 역사에 어원을 둔 말이다. 기원전 7세기 바빌로니아와 기원후 로마제국에서 추방된 유대인을 가리켜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쓰였다. 그래서 이 말엔 나라를 잃은 유대인이 살아갈 방편이 없어 세계 각지로 흩어진 것과 같은 이산의 아픔이 새겨져 있다.

근대 한국인이 나라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 것도 ‘슬픈 디아스포라’의 맥락에 닿아 있다. 1860년대 구한말 기근과 부패한 관리의 학정을 피해 조선인들은 중국(만주)·러시아(연해주)·하와이·멕시코·쿠바 등지로 떠났다.

한국인들이 중남미로 퍼진 계기는, 1905년부터 멕시코 유카탄반도에 많던 애니깽(용설란) 농장의 계약노동자로 간 것이다. 당시 멕시코로 이주한 1000여명은 중남미 이주의 노둣돌 구실을 했다. 1921년 멕시코에 경제난이 닥치자 그중 300여명이 쿠바로 옮겼다.

만주와 연해주행 이주는 일제강점기 때 ‘자발적’ 또는 ‘강제적’으로 이뤄졌다. 일제강점 초기엔 일본인들에게 땅을 빼앗긴 농민 등이 간도로 떠났다. 1932년 만주국 건설을 계기로 일본인들이 한인을 대규모로 집단이주시켰다. 1930년대 만주 지역의 조선인 인구가 50만여명으로 늘었다.

일본으로의 이주는 1차 세계대전 때 경제호황을 맞아 많은 조선인들이 ‘내지’(일본)의 노동자로 가며 본격화했다.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때 많은 조선인들이 광산과 전쟁터 등지로 강제로 끌려갔다.

1945~1962년 무렵엔 미국과 캐나다로 전쟁고아, 미국인과 결혼한 여성, 혼혈아, 유학을 원하는 학생들이 많이 이주했다. 1965년 서유럽 이민자들만 받던 미국이 이민법을 개정해 아시아인에게도 이민 문호가 활짝 열렸다. 미국에 가 있던 한인들이 한국에 있던 가족들을 초청해 ‘연쇄 이민’이 꼬리를 물었다. 1963년무렵부터는 브라질·아르헨티나·파라과이·볼리비아 등 남미로 농업 이민자들이 많이 갔다. 남미 이주자 중엔 이 지역을 교두보 삼아 북미로 진출하는 이들이 많았다.

유럽은 독일이 거점이 됐다. 1963년께부터 1977년까지 5323명의 광부, 1976년까지는 1만32명의 간호사들이 독일로 떠났다. 중동 특수가 한창이던 1985년엔 12만245명이 중동 건설노동자로 일했다.

1997년 구제금융사태 이후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동남아시아로의 ‘경제 이주’가 봇물을 이뤘다. 고용불안 탓에 30대를 중심으로 이민 바람이 분 것이다. 특히 고학력 전문기술직 종사자를 우대하는 이민정책을 시행한 캐나다 이민 붐이 거셌다. 최근 15년 동안 가장 두드러진 흐름은 동남아시아와 중국행 이주의 폭증세다. 사업과 투자를 목적으로 한 이주가 대부분이다.

21세기 한국인들에게 디아스포라는 ‘슬픈 이산’의 동의어가 아니다. 한 세기가 넘게 가난과 식민과 독재에 쫓겨 조국을 떠났다면, 21세기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아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이주가 늘고 있다.

이유주현 기자

참고문헌: <세계의 한인이주사> (윤인진 지음, 나남출판)
후원 :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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