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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현지시각) 네덜란드로 추가로 돌아온 말레이시아항공 여객기 피격 희생자 74구의 주검을 실은 차량들이 정밀한 신원확인을 위해 힐베르쉼 군기지로 옮겨지고 있다. 네덜란드인 희생자는 전체 탑승객 298명 중 193명에 이른다. 힐베르쉼/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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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해상 제국 네덜란드의 침묵이 길어지고 있다. 축구에서 보여지는 오렌지 군단의 현란함이나 올해 소치올림픽 스케이트 종목 석권 등 스포츠를 통해본 네덜란드의 인상은 강하다. 일찍이 해상 무역에 눈을 돌린 만큼 개방적인 나라는 일부 도시에서 마리화나나 매매춘을 합법화하는 등 실용적인 발상도 돋보인다. 그 때문인지 남한의 절반 면적이지만 농산물 수출에서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이고, 전 세계 꽃 수출시장의 3분의 2를 장악하고 있다. 유럽 대륙의 주요 물동량은 로테르담 항구를 거쳐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역상’ ‘중개인’ ‘장사꾼’의 이미지가 강하다. 이 나라가 17일 우크라이나 상공을 날던 말레이시아항공 여객기(MH17) 피격 때 자국인 193명(총 293명 사망)을 잃었다. 그런데 외신을 통해 보여지는 네덜란드의 분위기는 차분하다.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47)는 미사일 공격이라는 말 대신 “재난”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피격 여객기 희생자들의 주검을 모두 거둘 때까지 러시아의 협조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과연 네덜란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경제냐, 정치냐? 네덜란드의 선택은?
외신은 네덜란드가 전통적으로 정치의 경제 간섭을 싫어하는 전통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중개 무역 등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적 전통의 영향일 것이다. <블룸버그>는 21일 온라인판에서 ‘공포에 질린 네덜란드가 러시아와의 경제관계를 재고할 수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경제’ 키워드를 제시했다. 국민 여론은 여객기를 향해 폭발한 지대공 미사일 부크(SA-11)를 제공한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요구가 뜨겁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다국적 기업인 로열더치셸, 유니레버, 필립스, 하이네켄 등의 입장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셸은 세계적인 석유·가스 채굴 사업자인데 21세기 최대의 자원부국인 러시아와의 협력관계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미 사할린-2 구역의 석유, 가스전 개발을 하고 있고, 시베리아의 액화천연가스 개발의 주요 투자자로 투자규모만 수백억달러에 이른다. 이번 MH 17 피격 때 숨진 네덜란드인 가운데는 셸의 직원 4명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셸의 대변인은 러시아에 대한 투자재고에 대한 언론의 질문에 일절 답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연금의 상당 부분은 셸 등 대규모 기업의 주식에 투자해 놓았기 때문에 주가변동은 연금기금 수익률에 영향을 준다.
두 나라의 교역도 중요하다. 네덜란드의 대 러시아 수출도 지난해 72억유로에 이르는 등 중요한 시장이다. 러시아의 가스(2012년 기준 203억유로)를 수입해 그 가운데 95%를 중개무역으로 수출하는 것도 네덜란드 재정에 도움을 준다. 다만 네덜란드는 유럽국가들이 가스 수입량의 30%를 러시아에 의존하는데 비해, 노르웨이로부터 가스를 대규모로 공급받고 있다. 조세회피를 겸한 투자지역으로서도 네덜란드는 러시아 신흥 재벌·기업한테 주요한 파트너다. <로이터>는 2012년 러시아-네덜란드 비교에서 러시아 순 직접투자가 26억달러가 달했고, 2013년에는 네덜란드의 러시아 순 직접투자가 35억달러로 역전됐다고 보도했다. 주로 네덜란드에 적을 두고 있는 페이퍼컴퍼니에 의한 자금 이동이다. 네덜란드의 낮은 법인세를 활용하기 위해 법인 본부를 네덜란드에 세우는 경우도 많다. 부크 미사일과 칼라슈니코프 소총 등 무기를 만드는 기업을 포괄하는 러시아의 로스텍은 미국의 경제제재 대상 기업이지만, 네덜란드에서는 자유롭다. 네덜란드 언론은 “우리가 로스텍을 돕고 있나?”라는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석유·가스 자원으로 공생관계 만든 푸틴?
네덜란드 혼자서는 러시아를 견제할 수 없다.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는 유럽연합(EU) 28개국과 미국이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각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다. 유럽의 경제엔진 독일의 입장도 헷갈린다. 제재가 강화될 경우 유럽연합의 대 러시아 수출(1610억달러 규모) 가운데 3분의 1을 차지하는 독일 수출산업이 타격을 입는다. 일자리로만 따져도 30만개에 이른다는 게 외신의 분석이다. 독일은 특히 6200개 기업이 러시아에서 영업하면서 270억달러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유럽연합국 자운데 러시아 수출액 2위 이탈리아(지난해 110억유로)도 영국과 스웨덴, 폴란드 등 강경한 나라와 달리 제재에 소극적이다. 프랑스나 영국, 스위스에 들어온 러시아의 부동산 투자도 만만치 않다. 여기에 무기수출 계약도 이뤄져왔다. 물론 제재가 결정된다면 무기거래 항목에 대해서는 면책 조항을 두고 새로운 계약만 대상에 포함시킬 것이다.
어쨋튼 유럽의 러시아 제재의 구조적 한계는 1999년 집권해 실질적으로 14년간 러시아를 통치한 블라드미르 푸틴 대통령이 만들어놓은 공생관계 때문이다. <불룸버그>는 옛 소련이 해체될 때 러시아는 무력했지만, 지금은 경제 포섭망으로 주변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 국영 스베르방크는 중부유럽, 발칸반도, 키프러스까지 진출해 저리로 자금을 대출해주고 있다. 올초 헝가리의 핵발전소 건설에 30년 만기의 100억유로를 국제금리보다 낮게 지원한 것은 대표적이다.
과거 소비에트연방 블록에 있던 나라들 가운데 전통적인 앙숙 폴란드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를 제외하고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경제적 지원 관계를 통해 정치 영향력을 산 셈이다.
푸틴식 러시아 경제체제의 약점도 있다
세계 7위의 경제대국 러시아는 최근 15년간 급성장했다. 석유생산량 세계 1위와 가파른 유가 상승이 바탕이 됐다. 그러나 올해 1분기 성장률은 전년도 동 기간에 비해 0.9% 수준이고, 연간 성장률은 0.5%에서 정체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실업률은 5%, 인플레이션은 7%인데 러시아 채권에 대한 국제 금융시장의 신용부도스왑(CDS)은 중국이나 브라질, 인도의 채권보다 높다. 그 만큼 러시아 채권의 부도 위험성에 대비한 보험료가 더 커졌다는 뜻이다. 3월 크림반도 병합과 이후 우크라이나 반군지원 등 푸틴의 강공 팽창주의 정책이 부른 화다.
정세가 불안하면 자본은 이탈한다. 전문가들은 올해 900억달러의 외국자본이 러시아를 뜰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초기 경제제재가 이뤄지면서 러시아 기업들의 국제 자본 차입 비용은 커지고 있다. 러시아 국영 석유기업 로스네프트는 비피(BP)로부터 받을 5년치 대금 15억달러를 6월 미리 받았다.
<블룸버그>는 7월부터 내년6월까지 러시아의 은행이나 기업, 정부가 이자와 원금 등 채무 상환에 필요한 자금이 1570억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모건스탠리의 보고서를 인용했다. 올해 12월에만 350억달러가 필요하다. 중국이 협력해 숨통을 터줄 수는 있으나 제한적이다. 때문에 러시아 중앙은행은 온전히 채무압박과 경제침체 상황 등의 부담을 져야 한다.
모건스탠리 보고서는 (자본확보를 위해) 러시아 정부가 국내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독려할 경우 러시아 국내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기업들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가의 지속적인 인상이 일부 보전효과를 불러올 수 있지만, 올해말에는 경기후퇴에 들어갈 수 있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앤더스 애슬런드는 <블룸버그>에서 “러시아 국내총생산의 30%는 투자가 돼야 하는데 21%만 되고 있다. 궁극적으로 러시아의 잠재성장률이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국영 기업이 차지하는 국내총생산 비중이 50%를 넘어서고 있고, 최종 대부자인 중앙은행이 부실한 시중 은행에 천문학적인 물량을 쏟아붇고 있는 것도 리스크를 높이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 등의 경제제재에 대비해 비자나 마스터카드 등 결제시스템을 대체하기 위한 국영지불 시스템 개발하고, 8월부터는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하는 외국 기업은 러시아내 서버에 메시지 데이터를 의무적으로 보관하도록 하는 등 일부 시장규제나 보호주의적 조처를 취하고 있다.
미국, 아직은 살아 있다
러시아를 압박할 수 있는 힘의 큰 부분은 여전히 미국이다. 미국은 7월16일 러시아 국영석유회사 로스네프티와 민간가스회사 노바텍, 러시아 국영은행 VEB와 가스프롬뱅크 등 일부 에너지·금융기관의 미국 금융 시장 접근 금지 제재안을 발표했다. 앞서 러시아인과 기업에 대한 여행금지와 자산동결에 이은 2단계 조처다. 앞으로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개발에 대해서도 제재를 검토하고 있다. 이럴 경우 엑손모빌이나 핼리버튼, 내셔널오일필드바코(NOV) 등 러시아에 기술과 장비를 판매하는 미국 기업이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석유·가스개발 회사인 프랑스의 슐럼버거가 미국 휴스턴과 프랑스 파리 두곳에 본부를 두고 있는 등 미국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미국의 제재안이 발효되면 유럽 기업들도 러시아 투자에 한계를 갖게 된다. 미국의 힘은 석유나 가스개발 등에 필수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서 시베리아의 광대한 셰일가스 개발에는 미국의 핵심 장비와 기술요원이 없으면 안된다. 미국 스트랫포의 에너지 분석가인 매튜 베이는 “유럽 기업도 셰일가스에 대한 경험은 있으나 대부분의 장비나 노하우는 미국에서 나온다. 유럽에서 셰일가스를 채굴하는 기업들도 미국의 기술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의 제재는 유럽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 미국은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인 방크 로시야의 소유주 유리 코발추크와 겐나디 팀첸코에 대한 제재를 가했지만, 유럽연합은 아직 리스트에 올리지 않았다. 팀첸코의 볼가그룹은 미국의 제재대상이지만, 유럽연합회원국인 룩셈부르크에서 영업활동을 하고 있다. 팀첸코의 스트로이트란스가스는 최근 유럽연합 회원국인 불가리아를 관통하는 새로운 가스라인 부설공사 계약을 따냈다. 푸틴의 개인은행이라 불리는 코발추크도 유럽연합의 제재대상이 아니다. 유럽연합의 제재대상은 주로 정부공무원이나 군사지도자 등 크림반도 병합 및 우크라이나 반군과 연계된 사람들로 제한돼 있다.
네덜란드 정치적 결단하나?
네덜란드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다르다. 러시아의 에너지를 유럽으로 배분하지만 에너지 자체를 러시아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네덜란드 국민들의 정서가 예사롭지 않다.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속에서는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 최대 신문 <데 텔레그라프>는 여객기 피격 직후 우크라이나 반군에 대한 나토의 개입을 주장하고 나섰다. <뉴욕타임스>는 “항공기 피격에 대해 유하게 대한다면 그게 무슨 나라인가? 네덜란드 국민들은 러시아에 대한 강한 조처를 기대하고 있다”는 네덜란드 전문가의 말을 전했다. 16세기부터 영국 등과 경쟁했고, 1600만 정도의 인구와 5만달러 가까운 국민소득(세계 13위), 교육이나 수명 등 삶의 질을 평가하는 인간개발지수(세계 4위·2011년) 최상위권,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0.258·2012년)도 낮은 네덜란드의 국민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이 때문에 23일 <데 텔레그라프>에 보도된 네덜란드 국민들의 대 러시아 제재 여론은 78%의 찬성으로 나타났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중요해도 묵과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만 피격 사고로 숨진 희생자 전원의 주검이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러시아의 신경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다.
마르크 뤼트 네덜란드 총리도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금융이건 모든 옵션이 테이블에 있다”며 슬슬 행동에 나서려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실행에 옮길 수 있을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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