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건너는 난민들…유럽은 골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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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이탈리아 남부 코릴리아노 항구에 도착한 ‘유령선’ 이자딘호에서 난민들이 밖을 내다보고 있다. 약 360명의 난민들이 탄 이 배는 선원들 없이 바다를 떠돌다 구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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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고립돼 있어요. 지금 이탈리아 해안으로 향하고 있는데 배를 조종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도와주세요.”
새해 이틀째인 지난 2일 밤(현지시각), 이탈리아 해안경비대에 긴급구난을 요청하는 무선통신이 들어왔다. 공포에 질린 여성의 목소리였다. 발신 선박은 터키에서 출항한 이자딘호였다. 50년 가까이 가축운반선으로 쓰였던 낡은 선박에는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난민 360명이 타고 있었다. 여성과 어린이가 128명이나 됐다. 4년 가까이 내전 중인 시리아를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풍랑이 거센 겨울 밤바다를 연료가 떨어지고 전기도 끊긴 채 표류하던 이자딘호는 영락없는 ‘유령선’이었다. 몇 시간 뒤 이탈리아 해안경비선이 도착해 이튿날 자국의 한 항구로 예인하면서 비상사태는 끝났다.
앞서 지난해 12월30일 밤에는 난민 768명을 태운 화물선 블루스카이엠호가 악천후에 휩싸인 지중해 중부 해역에서 긴급구조 요청을 보내왔다. 이탈리아 해안경비대가 출동했을 당시 선박의 엔진실은 잠겨 있었고, 일정한 속도로 이탈리아 해안 쪽으로 돌진하도록 자동운항장치가 설정돼 있었다. 선원들은 도망가고 없었다. 필리포 마리니 해안경비대장은 선박 예인과 구조를 마친 뒤 기자들에게 “이건 시간과의 싸움이었다”고 아찔했던 순간을 돌이켰다. “해안경비대가 조타실로 들어가 항로를 변경했을 당시 선박은 이탈리아 해안에서 불과 몇 해리(1해리=1.85㎞)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만일 배가 해안을 들이박았으면 큰 재난사고가 날 뻔했지요.”
‘난민 유령선’이 유럽으로의 불법이주 알선을 하는 브로커들의 새로운 돈벌이 수법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유럽연합 국경 감시·경비기구인 프론텍스(Frontex)의 에바 몬큐어 홍보관은 “우리는 지난해 가을부터 화물선에 난민들을 가득 태운 (불법이주) 유형을 지켜보기 시작했다”며 “처음엔 일회성일 걸로 여겼는데 이젠 트렌드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고 영국 <텔레그래프>는 전했다. 그는 “불법이주 브로커들이 퇴역 선박을 헐값에 사들이고 선원들을 고용해 출항한 뒤 바다에서 선원들이 탈출하면서 구난 신호를 보낸다”며 “이는 특히 악천후일 경우 매우 위험한 신종 수법”이라고 우려했다.
‘아랍의 봄’ 이후 난민 급증
시리아 내전·IS 출현 등 여파
이탈리아 밀입국 시도 잇따라
최근 터키서 출항하는 배 늘어
브로커들 ‘유령선’ 돈벌이해상서 선원들 탈출뒤 구난신호
악천후땐 위험천만…고의 침몰도
그 과정서 14년간 4만여명 숨져
유럽은 갈수록 장벽 높여복지부담에 반이슬람 정서까지
적극적 수색 구조정책 버리고
해상 감시·경비쪽으로 초점 맞춰
사실 프론텍스에 지금까지 겨울은 ‘한숨 돌리는’ 계절이었다. 추운 날씨와 거칠어진 지중해 바닷길은 불법이주 희망자들로 꽉 찬 낡은 선박이 항해에 나서기에 위험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엔 불법이주를 알선하는 브로커들도 잠시 일손을 놓았다. 프론텍스는 웹사이트에서 “그러나 이번 겨울은 더 이상 그런 휴지기 관행도 없어진 것 같다”며 “2014년은 해상을 통한 유럽 밀입국이 진정한 연중 비즈니스가 된 첫해로 기록될 만하다”고 평가했다. 국제이주기구(IOM)는 “대형 화물선은 밀입국 알선자들이 (열악한 기상 여건 때문에) 소형 선박을 이용한 불법이주가 주춤해지는 겨울에도 다수의 난민을 태우고 지중해를 건널 수 있도록 해준다”고 지적했다.
이탈리아가 불법이주자들의 목표가 된 것은 난민이 대량 발생하는 북아프리카나 중동에서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들어가기에 가장 가까운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일단 이탈리아에 잠입하기만 하면 유럽의 다른 어느 나라로든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1985년에 발효된 ‘솅겐조약’ 덕분이다. 유럽 26개국이 가입한 솅겐조약은 회원국 공통의 출입국 관리 정책으로 국경 통행의 제한을 사실상 없앴다.
이자딘호나 블루스카이엠호에 탔던 난민들은 1인당 많게는 8000달러의 비싼 돈을 내고 목숨을 건 항해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브로커들에겐 한번 쓰고 버릴 고물 선박을 사들여 수리한 비용을 빼고도 한 건만으로 수십만달러를 남길 만큼 수지맞는 장사다. 반면 불법이주를 시도하는 난민들은 전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
성공적인 항해와 밀입국을 장담할 수도 없다. 독일 해운사인 함부르크 쥐트의 마티아스 귄터는 최근 일간 <도이체벨레>에 “이주 난민들은 건강 상태도 매우 열악하다. 그들 상당수는 4000~8000달러에 이르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신장이나 다른 장기를 팔기도 한다”고 말했다. 배에 타서도 제대로 된 의료보건이나 위생은커녕 몸을 덥힐 담요나 양질의 음식을 기대할 수 없다.
전통적인 불법이주 난민 출항지는 이집트,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다. 그러나 2013년부터는 터키에서 출항하는 난민선이 늘고 있다. 터키와 접한 시리아의 내전은 몇년째 계속되고, 이슬람국가(IS)가 시리아와 이라크의 북부 지역을 장악하면서 중동 지역 난민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지난 7일, 지난해 시리아 난민이 300만명을 넘어섰으며 많게는 427만명에 이를 수 있다고 밝혔다. 그중 상당수는 접경국인 레바논이나 터키로 탈출하거나 국경지대 난민 캠프에 수용되지만, 일부는 난민선에 올라 유럽으로 불법이주를 시도한다. 터키에서 난민을 싣고 출항한 선박은 이탈리아 영해까지 최대한 접근한 뒤 고무보트나 구명선 같은 작은 배로 난민들을 옮겨 태워 상륙을 시도한다. 풍랑이 심할 때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난민 선박을 몰고 나갈 선원들은 일회성으로 모집된다. 비용 절감과 보안을 위해서다. 이집트와 리비아 등 지중해와 접한 아프리카 북부에선 밀입국 브로커들이 10대 소년들을 선원으로 고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영국 <가디언>은 전했다. 이들은 이탈리아 당국에 체포될 경우 최대 15년의 징역형과 수십만유로의 벌금까지 물게 된다. 2000년 불법이주 알선과 지원 혐의로 이탈리아 감옥에 수감된 사이드라는 소년은 당시 나이가 겨우 15살이었다. “다른 선원이 우리에게 이탈리아 사람들이 우리를 가둘 것이라고 말해주고 나서야 감옥에 가리란 걸 알았어요. 난 절망에 빠져 울기 시작했어요.”
유럽연합의 해안경비대에 발각된 난민들은 대개 본국으로 되돌려 보내지거나 제3국의 난민 캠프에 수용된다. 전쟁이나 재해, 가난을 피해 새 삶터를 찾으려던 ‘유러피언 드림’도 접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들은 운이 좋은 편이다. 유럽 땅에 발을 내딛지도 못하고 차가운 바다에서 목숨을 잃는 난민이 부지기수다. 지난해 9월 초순 지중해에선 이집트에서 몰타로 향하던 불법이주민 선박 2척이 침몰해 700여명이 한꺼번에 숨지는 대형 참사를 빚었다. 이 중 500여명을 태운 난민선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극소수 생존자들이 밝힌 증언은 충격적이다. 브로커들이 험한 기상 조건에서 난민들에게 상륙용 소형 선박으로 옮겨타라고 요구하자 난민들이 거부했다. 그러자 브로커들이 자신들의 선박으로 ‘모선’을 들이박아 고의로 침몰시켰다는 것이다. 국제이주기구의 지난해 보고서를 보면, 2000년 이후 14년 동안 무려 4만명이 불법이주를 시도하다가 사고나 범죄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집계됐다.
이주 난민이 생기는 원인은 다양하다. 무력분쟁, 자연재해, 정치·종교적 박해, 인종 및 민족 갈등이 일반적이다. 도시 개발과 지구 온난화 등 거주환경의 변화로 삶터에서 내몰리는 이주 난민도 있다. 이주 난민은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외부 세력이나 환경으로부터 이주를 강요받고, 본디 거주지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갈 의향이 없으며, 돌아갈 경우 지속적인 박해나 곤경이 예상되고, 새로운 이주지에서 독립적인 경제생활을 할 기반이 거의 없다는 점이 특징으로 꼽힌다.
지중해를 건너려는 난민들의 정확한 수는 헤아리기 힘들다. 브로커들이 밀입국 희망자들을 비밀리에 모집하는데다, 승선자 명단이나 출항 기록 따위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유엔난민기구는 최근 지난해에만 약 20만7000명이 유럽으로 가려고 지중해를 건넜으며 최소 3419명이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지중해상 난민은 이전까지 최대로 알려진 2011년 리비아 내전 당시 7만명보다 3배나 급증한 수치다. 사망·실종자도 1년 전인 2013년 600여명의 5배에 이른다. 이와 별개로 프론텍스는 지난해 27만명이 육로나 해로를 통해 유럽으로 불법이주를 시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2013년 7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착좌 뒤 첫 외부 공식방문지로 이탈리아 남단 람페두사섬에 있는 난민 캠프를 찾아 난민들을 위로하고 세계에 난민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도 했다.
목숨을 걸고 밀입국을 하려는 난민들과 어떻게든 불법이주를 막으려는 유럽연합의 상반된 입장은 합일점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유럽연합은 난민 수용 기준과 이주민 정책이 서로 다른 28개 회원국 사이에서 ‘유럽 공동 난민 시스템’을 이끌어내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오랜 경제 침체와 복지 부담, 유럽 사회에 확산된 반이슬람 정서, 극우보수 집단의 정치세력화는 이주난민 수용과 사회통합의 큰 장벽이다.
이탈리아는 지난해 10월 해상난민 구조 프로그램인 ‘마레 노스트룸’(라틴어로 ‘우리의 바다’라는 뜻)을 공식 종료했다. 광역 해상에서 적극적인 난민 수색과 구조, 구호 활동을 벌였던 이 프로그램은 이후 유럽연합 국경 감시기구인 프론텍스의 ‘트리톤 작전’으로 대체됐다. 트리톤은 난민 보호보다는 해상 감시 및 경비에 초점이 맞춰졌다. 활동 해역도 이탈리아 연안 30마일 이내로 한정된다. 당시 영국 일간 <가디언>은 트리톤 작전에 배정된 예산이 월 290만유로 수준으로 마레 노스트룸 프로그램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고 보도했다. 안젤리노 알파노 이탈리아 내무장관은 “해양법이 규정한 의무는 앞으로도 존중될 것이며 난민 구조 의무를 포기하는 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인도주의 활동가들은 ‘트리톤’이 ‘마레 노스트룸’의 대체 프로그램으로 마련된 게 결코 아니라며, 이탈리아 해군의 대규모 지원 없이는 난민 사망자가 더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엔은 유럽이 이주민 장벽을 갈수록 높이고 있는 것을 비판하며 전향적인 이주정책을 촉구하고 있다. 이와 별개로 유엔난민기구는 지난해 6월 북아프리카에 난민수용소를 만드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진척이 없다. 난민 보호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대륙에 아프리카 난민이 몰려오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이란 지적도 나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리아와 아프리카의 수많은 난민들은 유럽으로 탈출을 꿈꾼다. 그러나 지중해 바닷길은 갈수록 새 삶을 찾는 희망의 여정이 아니라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는 ‘절망의 항로’로 바뀌어가고 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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