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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1.18 14:17 수정 : 2015.01.18 21:54

1954년 3월1일 오전 6시45분 태평양 마셜제도의 비키니섬에서 미국이 진행한 수소폭탄 폭발 실험 전경. 거대한 버섯구름이 솟아오른 가운데 붉은 섬광이 주변을 물들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54년 미국이 태평양서 수폭 실험
일본 원양어선 대거 피폭 당했지만
양국은 파장 우려 조기수습 합의
선원 23명만 피해자로 인정했다

‘답보’ 진상조사 활동이 2013년 반전
1300㎞ 지점 선원 피폭량 검출 결과
히로시마 원폭 1.6㎞ 지점과 비슷
사고 당시 정부 조사결과도 공개돼

일본정부가 조사 의지 밝혔지만“
아직은 자료 검증 단계” 발언 등
과연 적극적으로 나설지
관련 단체선 여전히 의심한다

“후생성이 (비키니 피폭을) 인권과 관련된 미해결 문제로 인식하고, 인과관계 해명을 위해 노력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지난해 7월1일, 일본 도쿄 후생노동성의 한 응접실.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오랫동안 일본 원양어선 선원들의 ‘비키니 피폭’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온 야마시타 마사토시 고치현 비키니수폭실험피해조사단장이 입을 열었다. 비키니 피폭이란 미국이 1954년 3~5월 태평양 마셜제도의 비키니섬 주변에서 진행한 6차례의 수소폭탄 실험으로 인근 해역에서 조업중이던 일본 참치잡이 원양어선 선원들이 피폭된 사건이다. 일본 정부는 이 가운데 1954년 3월1일 수폭 실험이 진행되던 지역에서 동쪽으로 160㎞ 떨어진 해상에서 조업하고 있던 제5후쿠류호 선원 23명의 피폭만을 인정했을 뿐 다른 선원들의 피폭은 인정하지 않아왔다.

야마시타 단장의 요청으로부터 6개월의 시간이 흐른 지난 5일,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흥미로운 보도를 내놓는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1954년 비키니 핵실험으로 피폭됐을 가능성이 있는 약 1만여명(선박 500여척)의 당시 선원들을 상대로 피폭과 건강과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추적조사를 진행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보도가 맞다면, ‘잊혀진 피폭’인 비키니 피폭에 대해 일본 정부가 전면 조사에 나서는 중대한 결단을 내린 셈이 된다.

비키니 피폭(*누르면 확대됩니다.)
2011년 3·11 후쿠시마 원전 참사를 겪은 일본에선 방사선이 인간의 건강에 끼치는 영향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진행중이다. 인간이 고선량의 방사능에 노출될 경우 화상·구토·탈모 등의 급성장애 현상이 일어나고 심한 경우 목숨까지 잃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낮은 수준의 피폭을 당할 경우 피폭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과관계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이 대규모로 피폭을 당한 사례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체르노빌 원전사고 △3·11 후쿠시마 참사 등 대형 재해로 한정돼 있을 뿐 아니라 피폭으로 인한 영향이 긴 시간에 걸쳐 느리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최악의 원전 사고로 불리는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때도 사고와 피해 지역 어린이들에게 발생한 갑상샘(갑상선)암 사이의 인과관계를 세계 의학계가 인정하는 데는 2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같은 이유로 현재 후쿠시마현에선 만 18살 이하의 어린이와 청소년 38만명을 대상으로 갑상샘암 발병 추이에 대한 추적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조사를 맡은 후쿠시마현립의과대학에선 “(아직은)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내놓고 있지만, 이에 대한 일본인들의 불신은 깊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60여년 전에 벌어진 비키니 피폭 선원들에 대한 건강 조사가 진행되면, 피폭이 인간에 미치는 장기적인 영향에 대한 좀더 확실한 정보가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비키니 피폭은 오랫동안 일본에서도 잊혀진 주제였다. 이 사건이 미-소 핵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냉전이 치열해지던 1950년대 중반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피폭 사고가 전면에 불거질 경우 세계의 비난 여론에 떠밀려 더 이상 핵과 수소폭탄 실험을 진행할 수 없게 될 것으로 판단한 미국과 원양어업 등 수산업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한 일본은 이 사건을 조기 수습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에 따라 일본 정부는 1954년 말까지 태평양에서 조업을 끝내고 돌아온 배·선원·어획물(참치)에 대한 피폭 조사를 진행하고도, 이 자료를 미국에 통보했을 뿐 외부엔 공표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 정부는 이듬해인 1955년 1월 미국으로부터 200만달러(당시 환율로 7억2000만엔)의 위로금을 받는 것으로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다”는 교환문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정부는 제5후쿠류호를 제외한 다른 원양어선의 선원들도 상당한 정도의 피폭을 당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이 지난해 8월 방송한 다큐멘터리 ‘수폭실험 60년 만의 진실: 묻혀져 있던 피폭’을 보면, 당시 일본 정부가 피폭 정도가 심한 일부 선원들의 혈액 검사까지 하고도 “아무 이상 없다”고만 했을 뿐 결과를 제대로 통보해주지 않았다는 선원들의 증언을 전하고 있다. 특히 수폭실험이 이뤄진 지점으로부터 1300㎞ 떨어진 곳에서 조업중이던 제2고세이호의 선원 구와노 유타카(방송 당시 81살)는 “수폭실험으로 인한 죽음의 재가 배에 1~2㎝ 정도 쌓였다”고 회고했다.

역사 속에 묻혔던 비키니 피폭의 기억을 되살린 것은 당시 참치잡이 원양어선의 전진기지 가운데 하나였던 시코쿠 지역 고치현의 고등학생들이다. 이들은 1985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40주년을 맞아 현지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비키니 피폭으로 고치현의 많은 선원들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현실을 알게 됐다. 당시 원양어선의 선원이던 후지이 세쓰야(1932~1960)는 원폭 후유증의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1985년 9월 지역 고등학교 교사인 야마시타를 중심으로 ‘고치현 비키니수폭실험피해조사단’을 결성해 본격적인 조사에 나선다. 이 과정을 거쳐 사고로부터 34년이 지난 1988년에야 조사 대상인 전직 선원 204명 가운데 3분의 1 정도인 61명이 암 등의 병으로 숨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놀라운 점은 일반 남성에게선 1만3000명 가운데 1명꼴로 발병하는 백혈병으로 숨진 이가 204명 중 3명이나 된다는 사실이었다. 고치현 출신의 국회의원은 사고 직후 일본 정부가 진행했던 조사 결과를 공개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마이 이사무 당시 후생상은 기록의 존재를 부정하고 “30년도 넘은 일이라 조사가 어렵다. 대책을 강구하는 것을 생각하기 힘들다”고 답했다.

오랫동안 답보 상태에 머무르던 진상조사 활동은 2013년 들어 반전의 계기를 맞았다. 야마시타 조사단장이 피폭과 병의 인과관계를 장기간 조사해온 히로시마대학에 도움을 요청하면서다. 이를 계기로 2013년 4월 히로시마대학 원폭방사선의과학연구소의 호시 마사하루 명예교수(방사선물리학), 오타키 메구 교수(통계학), 다나카 기미오 교수(혈액학) 등으로 구성된 연구팀이 발족했다. 당시 선원들의 피폭량이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판정하는 국제적 기준인 피폭량 100mSv(밀리시버트)를 넘는지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치다 마리(47) 제5후쿠류호전시관 학예원이 전시 중인 제5후쿠류호 실물을 배경으로 비키니 피폭 실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60년 전에 벌어진 피폭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문제였다. 아이디어로 나온 것은 인간이 한평생 사용하는 치아였다. 오랜 수소문 끝에 2013년 10월 수폭실험 당시 현장에서 1300㎞ 떨어진 지점에 있던 원양어선 제5메이가호에 승선했던 한 선원의 치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의 치아를 검사한 결과 414mSv의 피폭량이 확인됐다. 이 가운데 그가 일상생활이나 엑스레이 촬영으로 받은 피폭량을 빼고, 수폭실험으로 인한 피폭량은 319mSv로 추정됐다. 이를 히로시마 원폭의 사례로 환산하면 폭심지에서 불과 1.6㎞ 떨어진 지점에서 당한 피폭량과 비슷한 수치다.

만약 이 선원이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당했다면 피폭자 건강수첩을 지급받고 숨질 때까지 의료비 전액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밖에 별도로 진행한 선원 18명의 혈액을 통한 염색체 이상 조사 결과 13명에게서 평균치보다 많은 이상이 발견됐고, 그중 8명은 국제기준치보다 높은 128~306mSv의 피폭을 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가가 60년 동안 인정하지 않던 ‘제5후쿠류호 이외의 피폭’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또 <엔에이치케이> 방송 등의 정보공개 청구 등을 통해 그동안 후생노동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온 일본 정부의 사고 직후 조사 결과도 공개됐다.

그렇다면 일본 정부는 이제 피폭당한 원양어선 선원들에 대한 전면적 조사를 통해 60여년 동안 은폐된 진실과 아픔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이치다 마리(47) 제5후쿠류호전시관 학예원은 14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가 아직은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마이니치신문>의 보도는 좀 앞서간 듯하다”고 말했다. 시오자키 야스히사 후생노동상도 6일 기자회견에서 “아직은 공개된 자료에 대한 전문가의 평가와 검증을 받아보는 단계다. 일단은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정도의 발언에 그쳤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과 3·11 원전 참사의 아픔을 겪은 일본이 비키니 피폭의 감춰진 진실을 전면적으로 밝힐 수 있을지 주목된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160㎞ 떨어진 지점 항해하다가 ‘죽음의 재’ 맞아
간암·간경색·뇌출혈 등 선원 23명중 13명 숨져

제5후쿠류호 수폭 피해

일본 도쿄 고토구 유라쿠초선 신키바역에서 내려 ‘유메노시마 공원’ 쪽으로 10분쯤 걸으면 공원 안쪽으로 제5후쿠류호 전시관을 만날 수 있다. 일본에서도 ‘잊혀진 피폭’이라 불리는 비키니 피폭의 고통을 상징하는 140t급 목제 참치잡이 원양어선 제5후쿠류호가 실물 그대로 보존돼 있다.

제5후쿠류호는 1954년 3월1일 선원 23명을 태우고, 수폭 폭심지에서 불과 160㎞ 떨어진 주변을 항해하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서 놀랄 만한 섬광이 번쩍한 뒤 한시간쯤 지나 강한 방사선을 방출하는 ‘죽음의 재’가 주변 해역에 내리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서둘러 그물을 걷고 해역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4~5시간이나 방사능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재가 선원들의 피부에 닿거나 눈·코·입에 들어갔다. 당시 승무원 23명 가운데 무선장이던 구보야마 아이키치(당시 40살)는 급성 방사선 장애로 피폭 6개월 만에 숨졌다. 그를 포함해 13명이 간암·간경색·뇌출혈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현재까지 생존한 7명 가운데 3명은 피폭 사실을 적극 알리며 반핵 활동을 하고 있다.

제5후쿠류호 승무원들을 괴롭게 한 것은 세상의 편견과 차별이었다. 전시관의 이치다 마리(47) 학예원은 “이들이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당했다면 피폭자들에게 지급되는 건강수첩을 지급받고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1955년 1월 미-일 교환공문의 결과 일본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받게 된 200만달러에서 1인당 200만엔 정도의 위로금을 지급받는 데 그쳤다. 선원들 자신도 최근까지 자식들의 결혼 등에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피폭 사실을 적극적으로 호소하지 못했다.

현재 생존 승무원들은 1년에 한번씩 지바현에 있는 방사선의학종합연구소에서 건강검진을 받는다. 그러나 치료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매번 “괜찮다”는 말뿐이어서 검사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일본 정부는 제5후쿠류호 외에 주변에서 조업하던 다른 선박의 피폭 사실을 부정해 왔지만 지난해 당시 정부의 조사 문서 등이 공개되면서 빠져나가기 힘들게 됐다. 이치다 학예원은 “국가가 선원들에 대한 추적 조사를 진행한다면, 그 결과를 (3·11 참사를 겪은) 후쿠시마 사람들에게도 조금씩 적용할 수 있겠지만,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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