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5일 그리스 아테네 국회의사당 밖에서 구제금융 관련 개혁법안의 의회 표결을 반대하는 시위대들이 "우리는 그리스를 사랑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그리스 국기를 훼손하고 있다. 아테네/AP 연합뉴스
|
채권국, 빌려준 돈 92% 회수
그리스는 재정구조 나빠졌을 뿐
근본 원인은 유럽 금융자본주의 기술혁신 대신 임금 깎는 기업들
그리고 그에 바탕 둔 금융자본
세계경제 멋대로 쥐락펴락
자본주의 속성은 벼락경기·금융위기
한번도 공정한 사회 만든 적 없어
20세기 초 한때 고삐잡은 것처럼
초국가적 시장개입 고려해볼만 그리스가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세제와 연금 시스템을 고치고 관련법까지 바꿔야 하는 사태는 ‘주권 침해’라는 비판을 낳기에 충분했다. 나아가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근본적 회의론도 커지고 있다. ■ ‘호모 에코노미쿠스’ 신화의 파산 “이기적 인간의 합리적 선택이 최적의 결과를 만든다.” 공리주의에 뿌리를 둔 현대 주류경제학은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전제로 삼는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다양한 모습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준다.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는 이타성, 조건 없는 기부나 재산의 사회환원 등 얼핏 ‘비합리적 선택’으로 보이는 행위는 현실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전통 경제학에 심리학과 진화생물학을 접목한 행동경제학이 등장한 배경이다. “자본주의는 ‘가장 저급한 인간의 가장 저급한 동기가 어떻게든 가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믿는 깜짝 놀랄 만한 신념이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합리적 인간’ 가설에 바탕한 자유방임형 자본주의를 꼬집으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스를 재정 파탄으로 몰아간 일부 부유층의 행태, 그 이후 국제채권단이 구제금융 조건으로 ‘무조건 긴축’을 고집하면서 터져나온 난맥상은 이런 풍자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마크 블라이스 미국 브라운대 교수는 최근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 ‘아테네의 고통-왜 그리스가 재정위기로 비난받아선 안 되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그는 “그리스 위기의 뿌리는 그리스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위기의 근원은 유럽의 금융 구조다”라고 진단했다. “그리스는 단지 구제금융 자금이 흘러 지나가는 도관이었을 뿐”이며 “미디어가 거듭 떠드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는 어떤 식으로도 구제금융 자금의 수혜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구체적 수치로 확인된다. 세계 부채탕감 운동 조직인 ‘주빌리 부채 캠페인’이 정리한 자료를 보자. 2008년 유럽 금융위기 이후 그리스가 국제채권단의 구제금융을 요청한 2010년 당시의 국가부채는 약 3100억유로였다. 그런데 5년간 구제금융을 받고 난 2014년 말 그리스 국가부채는 3170억유로로 오히려 늘었다. 그리스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도 2010년 133%에서 2014년 말 현재 174%로 높아졌다. 유럽 채권단의 주장과 기대와는 달리, 재정구조가 건전화하기는커녕 더 악화된 것이다. 그리스 정부에 제공된 구제금융의 92%는 다시 채권단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유럽의 상업은행 등 민간 채권자들은 그리스에 투자한 돈을 대부분 되찾았다. 지난 5년간 대다수의 그리스 시민들이 비참한 생활을 감내하며 빚을 갚은 결과다. 최근 영국 일간 <가디언>이 사설에서 “그리스는 가입이 허용되지 않았어야 할 단일통화(유로)라는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지적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블라이스 교수는 앞의 글에서 “우리가 그리스 위기를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를 제대로 이해한 적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 정보화·공유경제가 여는 세상 그리스 구제금융 사태와 유로존의 균열 조짐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직접적 계기였다. 금융위기 직후 전세계 생산량(GDP)이 13%, 교역량은 20%나 급감했다. 유럽에선 그리스·포르투갈·아일랜드·스페인 등 유로존(유로화 통용 19개국)의 취약 국가들이 전례 없는 빈사 상태로 내몰렸다. 그리스가 3차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더욱 가혹한 긴축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선 비판론과 동정론이 뒤섞인다. 마찬가지로, 구제금융 재개 협상 과정에서 강경론으로 일관했던 독일에 대해서도 원칙주의라는 찬사와 비정한 빚쟁이라는 비난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그러나 어떤 평가나 비판도 진실의 일부만을 드러낼 뿐이다. 그리스 사태를 계기로, 유럽에선 좌우파를 막론하고 현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점에 대한 진단과 대안 모색이 활발해질 전망이다. 영국 준공영방송 <채널 4>의 경제부문 에디터인 폴 메이슨은 지난달 출간한 저서 <포스트 캐피털리즘>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구조적 한계를 짚고 대안 모델을 그려 보였다. 우리말로 옮기면 ‘후기 자본주의’ 또는 ‘자본주의 이후’ 정도다. 그가 지난 17일 일간 <가디언>에 이 책을 소개한 장문의 기고에는 ‘자본주의의 종말이 시작됐다’라는 제목이 달렸다. 메이슨은 기고에서, 현대 자본주의는 투기자본과 신자유주의가 시장을 장악하면서 자본주의 본연의 역동성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자유주의는 최근 200년 새 처음으로 임금을 억제하고 사회적 힘과 노동자 계급의 탄력성을 파괴하면서 번성한 경제모델”이라고 질타했다. 이전에는 노동자들의 조직된 힘 덕분에 기업가들이 임금 삭감이라는 낡은 사업방식을 되풀이하지 않고 혁신을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자본주의 형태를 만들어갔는데, 오늘날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메이슨은 ‘포스트 자본주의’의 특성으로 ‘공유경제’와 ‘정보화’에 주목한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지식정보는 사유재산이 아닌 공공재로 인식됐다. 그러나 지금은 생산 과정에서 지식 콘텐츠가 물질적 투입요소보다 더 큰 가치를 갖게 됐다. 문제는 정보의 개방성과 확장성이다. 지식재산권의 울타리에도 불구하고, 정보지식은 무한대로 복제와 유통이 가능한데다 그 비용이 거의 ‘제로’(0)에 가깝다. 근대 경제학의 출발점인 ‘무한한 욕망과 유한한 자원’, 즉 ‘희소성의 원칙’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메이슨은 이미 19세기에 카를 마르크스(1818~1883)가 “사회적으로 공유된 풍부한 지식정보에 기반한 경제의 역동성”을 내다봤다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사후에 출간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1939년)에서, 사회적으로 축적되고 공유되는 ‘일반지식’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연결하는 세상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런 정보경제가 “자본주의를 하늘 높이 날려버릴 것”이라고 썼다. 지금까지만 보면, 정보화 사회가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릴 것이란 마르크스의 예견은 빗나갔다. 그러나 현행 자본주의 시스템을 파열시키고 새로운 싹을 틔울 씨앗은 이미 자라고 있다. 메이슨은 유물변증법의 논리를 빌려, “오늘날 자본주의의 모순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풍부한 상품·정보’와 ‘재화를 사유화, 희소화, 상품화하려는 독점기업·은행·정부’ 사이의 모순”이라고 주장했다. ■ ‘돈’에 대한 뿌리 깊은 경계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에도 경제 전문가이자 이 신문 논설위원인 존 플렌더가 자신의 신간 <자본주의: 돈, 도덕성, 그리고 시장>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오늘날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칼럼이 실렸다. 플렌더는 먼저, 중국 증시가 최근 폭등과 폭락을 거듭하면서 중앙정부의 강력한 개입을 부른 사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디가 됐든 거품은 거품이며, 서구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자본주의라는 야수’를 길들이는 건 간단치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중국은 1978년 덩샤오핑이 시작한 개혁개방 정책으로 자본주의를 도입한 이래 인민들을 빈곤에서 구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플렌더가 지적한 중국의 자본주의화 비용은, 산업화 초기 단계의 폭압적 비인간화, 극심한 경기변동, 불평등의 심화에 그치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경제성장을 이끄는 돈의 유인, 한마디로 ‘탐욕’에 관한 것이라고 플렌더는 말한다.
|
영화 ‘베니스의 상인’ 스틸컷.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