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8.30 20:44
수정 : 2015.08.3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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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유전 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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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근모의 글로벌 모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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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유전 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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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0월6일 이집트의 전투기들이 이스라엘군이 점령하고 있던 시나이를 향해 발진했다. 같은 시각 시리아 공군은 이스라엘 북부를 폭격했다. 제4차 중동전쟁이다. 열흘 뒤 중동 산유국들은 석유수출 공식가격을 70% 인상했다. 이튿날에는 원유 생산량을 매달 5%씩 무한정 줄여나가기로 했다. 원유의 무기화, 제1차 석유파동의 시작이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아흐마드 자키 야마니 석유장관은 인터뷰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아랍 영토에서 완전히 철수해야만 종전대로 원유를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조치가 국제 세력균형의 변화를 의미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야마니 장관은 “그럴 것이다”라고 즉답했다. 그러면서 “당신들은 이 새로운 시대에 관해 우리와 심각하게 대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국제 원유 생산 능력은 넘쳐나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듯한 상황이었다. 미국의 원유 수입량이 3년새 약 두 배로 늘어났고, 사우디의 원유시장 점유율은 21%로 두 배나 커져 있었다. 석유시장 수급 구도의 반전, 원유 생산 개도국과 선진 산업국 간의 세력균형 변화의 배경에는 미국이 있었다. 수년간 계속된 미국 정부의 과소비는 금태환 정지 선언과 달러화의 평가절하를 야기했고 유가 폭등의 물리적 기반이 되었다.
달러의 평가절하와는 반대로, 유로존에 이은 최근 중국의 평가절하는 국제유가의 계단식 폭락세를 야기했다. 21년 전 중국 평가절하 때는 그 나비효과가 러시아의 국가부도로 귀결되었다. 그사이에 일본 엔화의 평가절하,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연쇄적인 외환위기가 있었다. 최근 국제 금융시장에 나타난 현상은 1990년대 파장의 축약판이다.
중국의 평가절하는 미국의 통화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1994년의 평가절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공격적으로 통화량을 긴축하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1993년 말 3.0% 수준이던 미국의 초단기 시장금리는 이듬해 4월까지 6.0%로 두 배나 인상되었다. 당시 중국이 위안화 가치를 달러에 그대로 묶어 두려면 통화량을 미국에 비례해서 대폭 긴축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의 평가절하는 미국의 금리인상 예상 시점을 한 달 앞두고 단행되었다.
중국의 환율정책 전환은 이미 지난해 초부터 시작되었다. 달러를 빌려 위안화에 투기하는 행위를 강력히 경고하면서 위안화 가치를 하락세로 반전시켰다. 환율의 변동폭을 확대하는 조처도 취했다. 미국이 양적완화 축소를 개시한 시기였다. 미국 통화정책에 대한 종속성, 긴축되기 시작한 달러와의 연결고리를 푸는 정책들이었다. 이번 평가절하를 통해 그 고리를 더욱 느슨하게 한 중국은 곧이어 기준금리와 지급준비율을 인하하는 통화확대 정책을 발표했다.
이 불똥이 어디로 얼마나 튈 것인지가 당장 전세계의 관심사다. 시선이 사우디아라비아로 쏠리고 있다. 사우디는 여전히 고정환율제를 쓰는 얼마 남지 않은 나라다. 3.75리얄을 가져가면 ‘항상’ 1달러를 내준다. 국민들은 수입물가가 안정돼 만족스럽다. 그러나 석유수출에 의존하는 정부의 재정은 빠른 속도로 망가지고 있다. 쌈짓돈을 헐어 쓰는 중이다. 유가 폭락이 시작된 지난해 8월 이후 열 달 만에 외환보유액이 809억달러나 감소했다. 아직은 6000억달러 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무한정 버티기는 어렵다. 올 한 해에만 사우디는 1200억달러, 국내총생산(GDP)의 20%에 달하는 재정적자를 낼 걸로 예상되고 있다. 유가가 100달러로 올라야만 균형을 맞출 수 있다.
40여년 전 세계 최대 산유국의 파워를 과시했던 사우디아라비아는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까? 다시 석유 생산을 줄이고 가격을 올릴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 전세계는 하루 평균 소비량을 200만배럴가량이나 웃도는 과잉생산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석유 무기화에 나섰다가는 재정수입이 시장 점유율을 빼앗기는 결과만 낳을 것이다. 이미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때 실패한 경험이 있다. 게다가 지금은 경제제재가 해제되는 이란이 대규모의 원유수출 물량을 대기시켜 놓은 상태다.
그렇다면 사우디에는 어떤 대안이 있을까? 금융시장에서는 방만한 재정지출을 대대적으로 줄이는 수밖에 없을 거라고 관측한다. 하지만 이 역시 쉽지 않다. 정부지원에 의존해온 국민들의 삶이 금세 팍팍해질 것이다. 민심이 흉흉해지고 정치가 불안해질 수 있다. 주변국들에 대한 지원이 줄면 지역 내 영향력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러시아처럼 고정환율제를 버리고 평가절하에 나서는 것 역시 사우디에는 위험할 수 있다. 물가가 치솟아 민심이 사나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우디의 재정이 방만해진 데에는 5년 전 중동을 휩쓴 민중봉기의 영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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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유전 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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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관심이 쏠리는 것만큼이나 사우디 왕정은 돌파구를 찾는 데 골몰해 있을 듯하다. 미국을 시작으로 일본, 유로존, 중국으로 확산된 평가절하 경쟁은 중동의 균형을 흔들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다.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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