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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1.18 22:38 수정 : 2015.11.19 14:47

17일 러시아 투폴레프-95 폭격기가 시리아 상공에서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다. 이 사진은 러시아 국방부가 공식 누리집에 올린 동영상의 일부로, 러시아 국방장관은 러시아 폭격기들이 이날 이들리브와 알레포 지역의 무장단체 거점들을 타격했다고 밝혔다. AP 연합뉴스

격화하는 ‘IS와의 전쟁’
(상) 이슬람국가, 누가 키웠나

이슬람국가(IS)는 수니파 아랍계 주민들의 불만으로 잉태됐다. 그리고 주변 아랍 정권들의 방조로 성장했다.

‘아랍의 봄’ 때 촉발된 반정부 시위의 확산으로 시리아가 내전으로 빨려들던 2011년 5월. 수도 다마스쿠스 북쪽 30㎞에 있던 악명 높던 세드나야 군사형무소의 육중한 철문은 열려 있었다. 바샤르 아사드 정권이 그토록 탄압하던 과격한 이슬람주의자 700여명은 그 문을 걸어 나왔다. 민주화 요구 앞에서 아사드 정권이 무슬림형제단 대원 등 정치범을 석방한 조처인 칙령 61호의 결과였다. 아사드 정권도, 석방된 이슬람주의자들도 이를 민주화 수용이나 ‘은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사드 정권은 석방된 이들이 곧 무기를 들 줄 알았고, 그들 역시 자신들의 무장 항거가 아사드 정권의 존속 명분으로 이용되리라고 충분히 예측했다.

아사드 정권은 이슬람주의자들을 석방해 반군 진영에서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하도록 방조했다. 이는 시리아 내전 구도를 아사드 정권이라는 세속주의 세력 대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으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내전에서 정권의 존속 명분을 구하는 전략이었다. 이슬람주의 무장세력과 아사드 정권 사이에서의 선택을 국제사회에 강요하는 전략이었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석방된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슬람국가의 전신인 ‘이라크이슬람국가’(ISI)가 시리아에 만든 누스라전선의 주축 세력이 됐다. 시리아 반군 진영의 최대 세력으로 성장한 누스라전선은 이슬람국가의 동력이 됐다. 지금 이슬람국가의 위협은 아사드 정권을 지탱하는 명분이다.

사우디·카타르 등
아사드 정권 붕괴에만 관심

알카에다 하부조직에서 독립
2014년 ‘국가 수립’ 선포
세계 최악의 테러단체로 확장

적대적인 공생 관계였다. 이는 지금 세계를 흔드는 이슬람국가 탄생과 존속의 첫 요인이다.

이슬람국가는 요르단 폭력배 출신의 이슬람주의자 아부 무사브 자르카위가 1999년 결성한 이슬람 무장단체 ‘유일신과 성전’이 뿌리이다. 이 단체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뒤 알카에다의 이라크 조직인 ‘이라크알카에다’(AQI·2004년)→‘이라크이슬람국가(ISI·2006년)→‘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ISIL·2013년)로 진화하다가, 2014년 6월29일 이슬람국가 선포로 이어졌다.

2010년 5월 아부 바크르 바그다디의 이라크이슬람국가 지도자 취임은 이슬람국가로 가는 전환점이다. 당시 이라크이슬람국가 세력은 미군의 증강과 반폭동 안정화 전략에 밀려 고사 직전이었다. 이라크의 내란이 잦아들자 미국은 서둘러 출구로 나섰다. 그해 8월31일 마지막 미군 전투병력을 철수시키고 지원 병력만 남겼다. 미군 철수 뒤 이라크 시아파 정부의 종파적 정국 운영은 수니파 아랍계 주민들의 소외와 불만을 깊게 했다. 바그다디는 이를 탈출구로 삼았다. 사담 후세인 정부군의 고위 장교들을 영입해 지휘관의 3분의 1을 이들로 채웠다. 후세인 정부군의 전투 능력과 수니파의 지지를 동시에 얻으려는 의도였다.

이슬람국가(IS)의 탄생
2011년 3월 시리아의 반정부 소요가 시작됐다. 7월 들어 시리아 정부군에서 탈영한 장교 7명이 자유시리아군(FSA)을 결성했다. 내전이 시작됐다. 바그다디는 한달 뒤인 8월 자신의 측근인 아부 무함마드 골라니(또는 자울라니)를 시리아에 파견했다. 골라니는 아사드 정권이 석방한 이슬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다음해인 2012년 1월23일 누스라전선 결성을 발표했다.

누스라전선은 알카에다의 시리아 지부로 출범했으나, 이를 감췄다. 누스라전선은 곧 반군 진영에서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해갔다. 대표적인 반군 세력인 자유시리아군은 각 조직의 연합체에 불과했다. 여기에 속한 친서방 반군과 그 지도자 대부분은 전투보다는 외국의 지원을 자신들의 축재에 이용했다. 누스라전선은 가장 전투력이 강한 세력이었다. 밀가루 배급 등 주민들을 위한 사회서비스와 복지도 제공했다. 그해 말 미국은 누스라전선을 이라크 내 알카에다의 별칭일 뿐이라며 테러 조직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시리아 전역에서 “시리아에서 유일한 테러 세력은 아사드”라는 구호가 울렸다. 수십개의 반군 조직들도 “우리 모두는 누스라전선이다”라며 옹호했다. 2012~13년 연말연시를 거치며 누스라전선은 서북부의 이들리브, 알레포에서 완전히 거점을 굳혔다. 누스라전선의 성장에는 주변 아랍 정권의 지원이 있다.

미국 등 서방은 아사드 정권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아사드 정권이 반서방이기는 했으나, 중동의 핵심부에서 이슬람주의 세력을 막는 방파제 구실을 해왔기 때문이다. 대안도 없이 아사드 정권을 붕괴시키면 제2의 이라크가 될 것이 분명했다.

미국이 좌고우면할 때 사우디아라비아 등 수니파 주변 아랍 정권들이 나섰다. 이라크 전쟁 뒤 중동에서 세력을 불리는 이란 주도의 시아파 연대 세력을 막기 위해서였다. 아사드 정권은 시아파의 분파인 알라위파였다. ‘시아파 종주국 이란-시리아의 아사드 정권-레바논의 시아파 민병대 헤즈볼라’로 이어지는 중동의 시아파 연대는 이라크 전쟁 뒤 수립된 이라크의 시아파 정부에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중동의 지역 헤게모니를 놓고 이란과 다투는 사우디는 카타르 등 주변의 수니파 보수왕정과 함께 시리아 반군 진영에 대한 지원에 나섰다.

카타르가 앞장서서 2013년 중반까지 약 30억달러를 시리아 반군 진영에 지원했다. 알레포 지역의 반군에게는 한달에 150달러가 월급으로 지급되기도 했다. 친서방 반군 지도자들은 이 돈을 자기 호주머니에 넣었고, 누스라전선은 세력 확장에 썼다. 터키는 이런 군수 지원의 통로였다. 2012년 4월~2013년 3월까지 약 70대의 수송기가 터키로 무기를 날랐고, 이 무기들은 터키-시리아 국경을 통해 반군들에게 전달됐다. 터키는 세계 각국의 이슬람전사 지원자들이 국경을 넘어 시리아로 가는 통로였다.

터키 역시 이슬람국가의 성장을 방조했다. 수니파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을 이용해서 이라크 전쟁 이후 커지는 터키-시리아-이라크 국경 지대의 쿠르드족 독립 움직임을 제압하려 했다. 2013년 중반 이후, 자신들의 지원이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의 성장으로 귀결되고 있음을 안 사우디는 카타르의 지원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우디 등 주변의 모든 수니파 아랍 정권들은 여전히 아사드 정권 붕괴가 먼저였다. 이슬람국가로 성장할 이슬람주의 무장세력들은 안중에 없었다.

충성서약 하면 점령지에 권력 위임
석유 밀매 등 이익을 주민과 공유
‘잔인한 처형’으로 내부결속 의도도
수니파 주민엔 ‘어쩔수 없는 대안’

시리아, 정권유지 위해 사실상 이용
터키도 쿠르드 독립 제압 위해 방치
미국 주도 공습 계속됐지만 건재
IS 탄생·존속 기본 요인 여전 탓

2013년 4월13일 바그다디는 누스라전선은 이라크이슬람국가에서 파생된 조직이라며, 두 조직을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로 통합한다고 발표했다. 알카에다 본부가 이를 반대하자, 바그다디는 알카에다와 절연했다. 누스라전선은 분열되어, 외국 출신 전사 등 다수 세력은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로 넘어갔다. 누스라전선이 장악했던 락까 등 시리아 동북부 대부분 지역도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의 세력권으로 변했다.

시리아 내전을 자양분으로 다시 회생한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는 2014년 1월 팔루자를 점령하면서 이라크에서도 완전히 세력을 회복했다.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는 2014년 6월5일 드디어 대공세를 시작했다. 이날 이라크 서북부의 사마라를 점령하고 다음날 이라크 2대 도시인 모술을 공격해 사흘 만에 함락했다. 이때부터 이들은 티크리트 등을 거치며 무인지경으로 바그다드 인근까지 진격했다. 6월29일 시리아와 이라크에 걸친 영역을 가진 이슬람국가가 선포됐다. 영국만한 크기의 영역이다. 이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수니파 주민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

아사드 정권의 학살에 노출된 시리아의 수니파 주민, 시아파 정부의 학정에 시달리는 이라크의 수니파 주민들에게 이슬람국가는 어쩔 수 없는 대안이었다. 이슬람국가 역시 이를 이용했다.

첫째, 이슬람국가는 한 지역을 점령하면, 그 다음날로 부족장이나 지역 대표에게 권력을 위임했다. 이슬람국가에 대한 충성, 이슬람국가 문장 외의 다른 공식 문장 금지 등 몇가지 조건을 달고 그 지역을 관리할 책임을 맡겼다. 이슬람국가 대원들은 외곽의 경비로 빠졌다. 수니파 부족들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둘째, 이슬람국가는 수니파 부족 주민들과 이권을 공유했다. 석유 밀매가 대표적이다. 국제사회의 오랜 제재를 받은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석유 밀매는 주민들의 중요한 수입원이다. 이슬람국가는 유정만을 차지해 이 석유를 주민들에게 팔면, 주민들은 정제와 밀매 과정을 거치며 이익을 남겼다. 연합국이 공습으로 유정을 파괴하면, 수니파 주민들이 분노했다. 그리고 이라크의 유정은 깊지 않아서 곧 복구될 수 있었다.

셋째, 점령 지역에서의 참수 등 잔인한 처형은 적을 향한 충격과 공포 전술이기도 하고, 수니파 주민을 향한 상징 의식이기도 했다. 처형된 이들은 주민들을 괴롭히던 시아파 정부 관계자가 많았다. 이슬람국가에 점령당하기 전인 2013년~2014년 상반기까지 모술에서는 시아파 경찰이 10일마다 재판 없이 주민들을 즉결처형했다. 이슬람국가가 모술을 점령한 뒤 벌인 잔인한 처형에는 그런 경찰 인사들이 포함됐다.

미국 <뉴욕 타임스>는 2014년 7월23일 이슬람국가 치하의 락까의 모습을 최초로 보도했다. “락까의 시내에서 교통경찰은 교차로를 정리하고 있고, 범죄는 드물고, 세금징수원은 영수증을 발행해줬다…가게 주인들은 한달에 20달러를 세금으로 냈다…그 돈은 아사드 정부의 관리들에게 주던 뇌물보다도 적었다…‘도둑들이 아니라 존경할 만한 국가와 상대하는 느낌’이라고 한 금은방 주인은 말했다. 그 옆에서 한 여인이 외국의 남편이 보내준 돈으로 금을 사고 있었다.” 신문은 락까의 질서는 암울했으나, 시민들은 폭력과 혼란보다는 그런 질서마저도 반기고 있다고 전했다.

이슬람국가가 선포된 뒤 미국 주도의 공습이 시작되고, 이는 9월 들어 시리아로까지 확대됐지만 이슬람국가는 건재했다. 그들을 탄생시키고 존속시키는 기본 요인들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2014년 말 터키 접경의 쿠르드족 마을 코바니를 두고 이슬람국가와 쿠르드족 민병대 인민수비대가 공방을 벌였다. 터키는 국경에 탱크를 배치하고, 쿠르드족 민병대들의 지원을 막았다. 사우디 등 9개 수니파 주변 정권들은 올해 3월 예멘 내전에서 시아파 후시 반군들이 득세하자 즉각 연합군을 구성해 공습을 시작했다. 반면 이슬람국가와의 전쟁은 여전히 말로만 떠들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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