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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러시아 투폴레프-95 폭격기가 시리아 상공에서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다. 이 사진은 러시아 국방부가 공식 누리집에 올린 동영상의 일부로, 러시아 국방장관은 러시아 폭격기들이 이날 이들리브와 알레포 지역의 무장단체 거점들을 타격했다고 밝혔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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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화하는 ‘IS와의 전쟁’
(상) 이슬람국가, 누가 키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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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드 정권 붕괴에만 관심 알카에다 하부조직에서 독립
2014년 ‘국가 수립’ 선포
세계 최악의 테러단체로 확장 적대적인 공생 관계였다. 이는 지금 세계를 흔드는 이슬람국가 탄생과 존속의 첫 요인이다. 이슬람국가는 요르단 폭력배 출신의 이슬람주의자 아부 무사브 자르카위가 1999년 결성한 이슬람 무장단체 ‘유일신과 성전’이 뿌리이다. 이 단체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뒤 알카에다의 이라크 조직인 ‘이라크알카에다’(AQI·2004년)→‘이라크이슬람국가(ISI·2006년)→‘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ISIL·2013년)로 진화하다가, 2014년 6월29일 이슬람국가 선포로 이어졌다. 2010년 5월 아부 바크르 바그다디의 이라크이슬람국가 지도자 취임은 이슬람국가로 가는 전환점이다. 당시 이라크이슬람국가 세력은 미군의 증강과 반폭동 안정화 전략에 밀려 고사 직전이었다. 이라크의 내란이 잦아들자 미국은 서둘러 출구로 나섰다. 그해 8월31일 마지막 미군 전투병력을 철수시키고 지원 병력만 남겼다. 미군 철수 뒤 이라크 시아파 정부의 종파적 정국 운영은 수니파 아랍계 주민들의 소외와 불만을 깊게 했다. 바그다디는 이를 탈출구로 삼았다. 사담 후세인 정부군의 고위 장교들을 영입해 지휘관의 3분의 1을 이들로 채웠다. 후세인 정부군의 전투 능력과 수니파의 지지를 동시에 얻으려는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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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국가(IS)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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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밀매 등 이익을 주민과 공유
‘잔인한 처형’으로 내부결속 의도도
수니파 주민엔 ‘어쩔수 없는 대안’ 시리아, 정권유지 위해 사실상 이용
터키도 쿠르드 독립 제압 위해 방치
미국 주도 공습 계속됐지만 건재
IS 탄생·존속 기본 요인 여전 탓 2013년 4월13일 바그다디는 누스라전선은 이라크이슬람국가에서 파생된 조직이라며, 두 조직을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로 통합한다고 발표했다. 알카에다 본부가 이를 반대하자, 바그다디는 알카에다와 절연했다. 누스라전선은 분열되어, 외국 출신 전사 등 다수 세력은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로 넘어갔다. 누스라전선이 장악했던 락까 등 시리아 동북부 대부분 지역도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의 세력권으로 변했다. 시리아 내전을 자양분으로 다시 회생한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는 2014년 1월 팔루자를 점령하면서 이라크에서도 완전히 세력을 회복했다.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는 2014년 6월5일 드디어 대공세를 시작했다. 이날 이라크 서북부의 사마라를 점령하고 다음날 이라크 2대 도시인 모술을 공격해 사흘 만에 함락했다. 이때부터 이들은 티크리트 등을 거치며 무인지경으로 바그다드 인근까지 진격했다. 6월29일 시리아와 이라크에 걸친 영역을 가진 이슬람국가가 선포됐다. 영국만한 크기의 영역이다. 이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수니파 주민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 아사드 정권의 학살에 노출된 시리아의 수니파 주민, 시아파 정부의 학정에 시달리는 이라크의 수니파 주민들에게 이슬람국가는 어쩔 수 없는 대안이었다. 이슬람국가 역시 이를 이용했다. 첫째, 이슬람국가는 한 지역을 점령하면, 그 다음날로 부족장이나 지역 대표에게 권력을 위임했다. 이슬람국가에 대한 충성, 이슬람국가 문장 외의 다른 공식 문장 금지 등 몇가지 조건을 달고 그 지역을 관리할 책임을 맡겼다. 이슬람국가 대원들은 외곽의 경비로 빠졌다. 수니파 부족들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둘째, 이슬람국가는 수니파 부족 주민들과 이권을 공유했다. 석유 밀매가 대표적이다. 국제사회의 오랜 제재를 받은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석유 밀매는 주민들의 중요한 수입원이다. 이슬람국가는 유정만을 차지해 이 석유를 주민들에게 팔면, 주민들은 정제와 밀매 과정을 거치며 이익을 남겼다. 연합국이 공습으로 유정을 파괴하면, 수니파 주민들이 분노했다. 그리고 이라크의 유정은 깊지 않아서 곧 복구될 수 있었다. 셋째, 점령 지역에서의 참수 등 잔인한 처형은 적을 향한 충격과 공포 전술이기도 하고, 수니파 주민을 향한 상징 의식이기도 했다. 처형된 이들은 주민들을 괴롭히던 시아파 정부 관계자가 많았다. 이슬람국가에 점령당하기 전인 2013년~2014년 상반기까지 모술에서는 시아파 경찰이 10일마다 재판 없이 주민들을 즉결처형했다. 이슬람국가가 모술을 점령한 뒤 벌인 잔인한 처형에는 그런 경찰 인사들이 포함됐다. 미국 <뉴욕 타임스>는 2014년 7월23일 이슬람국가 치하의 락까의 모습을 최초로 보도했다. “락까의 시내에서 교통경찰은 교차로를 정리하고 있고, 범죄는 드물고, 세금징수원은 영수증을 발행해줬다…가게 주인들은 한달에 20달러를 세금으로 냈다…그 돈은 아사드 정부의 관리들에게 주던 뇌물보다도 적었다…‘도둑들이 아니라 존경할 만한 국가와 상대하는 느낌’이라고 한 금은방 주인은 말했다. 그 옆에서 한 여인이 외국의 남편이 보내준 돈으로 금을 사고 있었다.” 신문은 락까의 질서는 암울했으나, 시민들은 폭력과 혼란보다는 그런 질서마저도 반기고 있다고 전했다. 이슬람국가가 선포된 뒤 미국 주도의 공습이 시작되고, 이는 9월 들어 시리아로까지 확대됐지만 이슬람국가는 건재했다. 그들을 탄생시키고 존속시키는 기본 요인들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2014년 말 터키 접경의 쿠르드족 마을 코바니를 두고 이슬람국가와 쿠르드족 민병대 인민수비대가 공방을 벌였다. 터키는 국경에 탱크를 배치하고, 쿠르드족 민병대들의 지원을 막았다. 사우디 등 9개 수니파 주변 정권들은 올해 3월 예멘 내전에서 시아파 후시 반군들이 득세하자 즉각 연합군을 구성해 공습을 시작했다. 반면 이슬람국가와의 전쟁은 여전히 말로만 떠들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디스팩트 시즌2 방송 듣기 바로가기 팟빵 : 바로 가기 아이폰용 아이튠즈 : 바로 가기 안드로이드용 쥐약 앱 :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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