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5.11 16:14
수정 : 2016.05.1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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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기술은 인류에게 ‘에너지’라는 선물과 ‘핵폭탄’이라는 재앙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과학자들의 핵 기술 개발은 과연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사진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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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히로시마 투하 원폭 정당성 둘러싼 논쟁
미-일 양국 극비 문서나 증언 등 통해 그림 그려보니…
‘조기 종결설’ 결론 힘들지만, 세계정세 결정지은건 사실
▶ 바로 가기 : [화보] 원자폭탄 투하로 폐허가 된 1945년 8월 일본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이 정말 세계 2차대전을 조기 종결시킨 것인가? 원폭 투하의 정당성을 둘러싼 이 ‘근원적 문제’에 대해선 똑 부러진 해답을 내놓긴 쉽지 않다. 그러나 그간 공개된 미-일 양국의 극비 문서나 증언 등을 통해 어느 정도 그림을 그려볼 순 있다.
미국에서 핵 개발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39년 8월 헝가리 출신의 과학자 레오 실라르드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독일이 핵분열을 이용한 신형 폭탄을 개발할 수 있다”는 서한을 보낸 뒤다. 이 서한에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였던 알버트 아인슈타인도 서명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이후 미국의 핵 개발은 1942년 9월 시작된 ‘맨해튼 계획’이라는 극비 계획으로 구체화된다. 미국은 이 사업에 3년 간 20억달러라는 천문학적 금액과 12만명의 연인원을 동원한다. 결국 미국은 1945년 7월19일 뉴멕시코의 앨라모고도 사막에서 최초의 플루토늄형 원자폭탄 실험을 성공시키며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핵무기를 손에 쥐게 된다.
당시 미국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독일이 패망하면 3개월 뒤 소련이 대일 전쟁에 참여한다는 극비 합의를 맺어두고 있었다. 그러나 공통의 적인 독일이 패망한 뒤 미-소는 유럽의 전후 처리를 둘러싸고 본격적인 체제 대결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원폭으로 전쟁을 종결시킨다면 전후 국제질서를 확립해 가는데 소련보다 우위에 설 수가 있고, 막대한 세금을 소비한 맨해튼 계획에 대한 국내적인 명분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미 국립공문서관에서 발견된 제임스 번즈 전시동원국장관(이후 국무장관)이 1945년 3월3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만약 (맨해튼 계획이) 실패로 끝나면, 그땐 엄혹한 조사와 비판을 받게 될 것”이란 우려를 전하고 있다. 그밖에 미국은 일본이 오키나와전쟁에서 보여준 ‘특공 작전’(자살 공격) 등에 놀라 일본 본토를 대상으로 한 상륙 작전을 수행하는데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해답은? 결국 원폭이었다.
반대로 일본의 수뇌부들은 패전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쉽게 전쟁을 끝낸다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2012년 8월15일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이 방영한 ‘종전, 왜 빨리 결정하지 못했을까’를 보면,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일본 수뇌부의 무능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스즈키 간타로 총리, 도고 시게노리 외상, 육해군의 수뇌부 등 6명이 모여 비밀 회의를 이어가지만 분명한 ‘강화 조건’을 연합군에 제시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에선 “마지막으로 미국에게 큰 타격을 입혀 조금이라도 유리한 강화 조건을 도출해야 한다” “소련을 통해 강화 협상의 중재를 맡기자”는 탁상공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1945년 7월26일 미.영.소가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나서며 백일몽으로 끝나게 된다. 결국 일본 수뇌부가 결단을 미루는 사이 오키나와전쟁, 두번의 원폭 투하 등을 통해 60만명의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기에 이른다. 이런 일본 내부의 문제까지 미국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온당치 않다.
원폭이 전쟁을 조기 종결시켰는지에 대해선 분명한 결론을 내기 힘들지만, 원폭 투하가 한반도를 포함한 세계정세를 결정지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의 원폭 투하가 늦었다면 소련이 한반도를 모두 점령했을 수 있고, 빨랐다면 소련의 한반도 남하가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라 분석을 내놓는 전문가들도 있다.
그러나 냉전기 아슬아슬한 세계 평화를 유지한 것은 미국의 핵 독점이 아닌 핵 확산이었다. 테오도르 홀(1925~1999) 등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던 일부 과학자들은 핵 개발과 관련된 극비 자료를 소련에 건넨다. 이를 토대로 소련은 미국의 첫 핵 실험 성공 이후 4년 만에 핵 개발을 이루게 된다. 이후 인류는 한쪽이 핵무기를 사용하면 곧바로 보복 공격을 받게 돼 인류 전체가 멸망한다는 상호확증파괴, 즉 매드(MAD·Mutual Assured Destruction) 전략에 기대 아슬아슬한 공포의 균형을 이어가고 있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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