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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9.08 22:10 수정 : 2016.09.09 09:10

그리스 아테네의 신디그마 광장과 국회 의사당. 유재원 교수 제공

유재원 교수가 길에서 만난 그리스 사람, 역사, 문화
(마지막회) 신다그마 광장에서

그리스 아테네의 신디그마 광장과 국회 의사당. 유재원 교수 제공
? 신다그마 광장에서

신다그마 광장은 아테네의 심장이다. 1843년 9월3일,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는 성안 시민들의 압력에 못 이겨 그리스의 국왕 오토는 헌법을 선포했다. 그때부터 이 광장은 신다그마 광장, 즉 ‘헌법 광장’이라 불린다.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그리스의 근현대사는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역사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바로 이곳에서 2012년 4월4일, 78세의 약사 ‘디미트리스 흐리스툴라스’가 “쓰레기통을 뒤지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자살했다. 양극화가 가져온 비극의 현장이다. 민주주의란 완성된 기성품이 아니다. 이루어진 듯하다가도 순식간에 무너지는 허망한 존재다. 시민들이 온 힘을 다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지키지 않는다면 결코 얻을 수 없는 이상향이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주어진 것’으로 착각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신다그마 광장에 서서 민주주의의 미래를 묻는다. 대답은 잘 모르겠다.

그리스 아테네 신다그마 광장 쪽에서 본 국회 의사당. 유재원 교수 제공
■페리클레스 시대의 정치적 문제들

모든 축제는 절정의 순간에 마지막을 맞는다.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도 이 운명을 비켜가지 못했다. 페리클레스는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로 민주주의를 완성시킨 주인공인 동시에 그 종말을 가져온 장본인으로서 아테네 최후의 민주주의자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막 시작된 지 3년도 채 안 된 기원전 429년, 페리클레스가 복병 페스트에 걸려 66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게 되자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페리클레스가 정치에 입문하던 시기에 일반 시민들의 참정권을 어디까지 허락할 것인가에 대한 아테네 지도 계층의 의견은 크게 둘로 나뉘어 있었다. 키몬을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신중함을 보였다. 고도의 정치력과 도덕적 판단을 요구하는 국가 중대사에 대한 결정 과정에까지도 일반 시민 참여를 허용할 것인가에 대해 키몬은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이런 태도는 초기 민주화를 주도했던 클레이스테네스와 같은 인물들의 입장이기도 했다. 클레이스테네스 개혁의 초점은 평민들의 권리가 억울하게 침해당하지 않도록 지켜주면서, 시민 여론이 국정에 자유롭게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다.

당시 클레이스테네스를 비롯한 민주파 귀족들은 평민들에게 정치 참여를 제도적으로 허용하더라도 평민들이 다수의 힘으로 국정을 함부로 다루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그런 까닭에 클레이스테네스는 귀족들의 합의 기구였던 아레이오스 파고스에 실질적인 권한을 계속 유지시켰다. 평민들도 자신들이 지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귀족과 동등하다고 여기지도 않았고, 귀족 계급으로 대표되는 전통 질서와 규범과 가치관을 부정하거나 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평민들의 의식에 변화가 생겼다. 특히 페르시아와 두 번의 전쟁을 치르면서 평민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능력과 존재 가치에 대해 점점 더 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제 평민들은 전통과 관행이 더 이상 신성 불가침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집착이나 준수가 아테네 발전이나 번영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건전한 시민들의 집단 지혜는 전통이나 귀족들의 탁월성을 능가할 수 있고, 시민들 사이의 토론과 설득에 의해 타협하고 합의하지 못할 국가 문제는 없고, 훌륭한 지도자만 있으면 시민들 자신이 설득을 통해 국가 통치를 합리적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이런 시민들의 의식 변화에 힘입어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민주파 지도자들은 다수인 시민들의 실재를 인정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판단하여 아레이오스 파고스의 권한을 대폭 민회로 넘기고 상위 두 계급에 한정되었던 고위직을 평민들에게까지 확대했다. 이렇게 되자 평민들은 더 이상 귀족 웃어른들의 의사에 순응하여 그들에게 잘 보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정치적으로 출세하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게다가 평민들을 아테네의 가장 큰 경제적, 군사적 자원으로 여겼던 페리클레스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개혁 성향의 평민들이 생활 걱정 없이 폴리스의 정치 제도와 정책에 접근할 수 있도록 공공 업무를 맡은 시민들에게 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했고, 공공 자금을 풀어 여러 가지 사업을 벌임으로써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었다. 특히 수당 지급은 이미 돈이 충분한 귀족 계급에게는 매력이 될 수 없었지만 서민층에게는 사회 참여에 큰 동기를 부여했다. 전시에 최대 시민병을 동원하고픈 욕망이 최하 계층에까지 참정권을 부여한 속 마음이었다. 이런 조처로 말미암아 많은 농민들이 전원을 떠나 도시에 거주하면서 원정군, 수비군, 공무 종사자로 일하면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들이 페리클레스의 권력 기반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농촌에 거주하는 보수 성향의 농부들의 민회 참여율은 낮은 편이었다. 거기에 이제 더 많은 개혁파 시민들이 도심으로 몰려들면서 민회에서의 세력 균형은 민주파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귀족파의 양대 세력인 알크마이온 집안과 필라이다이 가문 사이의 협력 관계도 끝이 났다. 이제 귀족파는 지도자도 없이 분열되어 국내 정치에서 영향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제 민중의 힘은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새로운 제도는 새로운 현실을 낳고, 주어진 권리는 행사되게 마련이며, 새로 등장한 권력은 그것을 대변하는 새로운 정치 지도자를 배출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플라톤의 말대로 민주정에서는 자유라는 명분으로 인간들의 무분별한 욕망 요구가 허용되고, 이것이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부여되어야 한다는 의미의 평등이 지배하게 된다. 또 플루타르코스가 지적한 대로 자유란 지나치면 길들여지지 않은 망아지마냥 제멋대로 날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페리클레스의 조처에 의해 민중들은 더 대담해져 정부 전체를 스스로 장악하게 된 마당에 새로운 정치 위기가 닥치면 과연 평민들이 이 위기를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욱이 민중들에게 페리클레스와 같은 비전과 정치력, 권위를 가진 지도자가 사라졌을 경우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문제는 한 시대의 평민들이 건전했다고 해서 다음 세대의 평민들도 새로운 상황에서 동일하게 건전한 의식과 행동을 가지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는 데에 있었다.

한창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에 40대였던 페리클레스는 이에 대한 고려를 전혀 하지 않은 듯하다. 페리클레스에게는 자신이 아직 젊기에 이런 문제가 당장 위기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페리클레스가 예상하지 못했던 위기는 또 있었다. 바로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전염병과 같은 변수였다. 이런 불행한 우연들이 겹치자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페리클레스의 죽음 이후에 아테네에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 큰소리치고 민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다수에게 선심을 베푸는 선동 정치꾼 데마고고스가 득세하면서 쇠락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플라톤은 민주주의에서는 독재가 싹트게 마련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리스 아테네 국회 의사당 앞의 무명 용사 비. 이곳에서 외국 국빈들이 헌화를 바친다. 왼쪽 위에 "용감한 자에게는 어디든 무덤이 될 수 있다"라는 구절이 쓰여 있다. 유재원 교수 제공

■페리클레스의 제국주의적 성향과 정책

페리클레스는 국내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수호자임을 자처했지만 해외 정책에서는 철저히 제국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는 델로스 동맹에 가입한 동맹국들의 분담금을 아테네가 동맹국들에 제공하는 안전에 대한 당연한 대가라는 논리로 합리화하면서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동맹국들의 반란을 단호하게 진압하는 한편 분담금을 일방적으로 정해 강요했다. 페리클레스는 처음부터 아테네가 아니라 그리스 전체를 염두에 두고 정치를 한 것 같다. 페리클레스의 관심사는 아테네가 그리스의 중심, 그리스의 심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그리스의 전통적 강국인 스파르타에 대해 비우호적이었다. 그의 생각에 그리스 세계 안에 두 맹주의 공존은 불가능하지도 또 바람직스럽지도 않았다. 그에게 스파르타는 극복과 타도의 대상이었지 동맹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기원전 450년, 키몬이 키프로스 원정 중에 전사한 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평화 공존의 가망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게다가 페리클레스의 출현으로 아테네의 자존감은 한껏 부풀려져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 체제에 대한 아테네 체제의 우수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우선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수에 있어서 자유 시민의 수가 절대 우세한 아테네가 절대로 유리하기에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면 틀림없이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다. 페리클레스의 이런 정책과 신념이 그리스 세계 전체의 몰락을 가져온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불러일으켰다. 만약에 페스트란 변수가 없었더라면 그의 예상대로 아테네가 스파르타를 누르고 그리스 세계의 유일한 맹주로 떠오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육군이 강한 스파르타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농촌의 시민들을 좁은 도심으로 이주시키는 바람에 주거 환경과 위생이 악화되면서 아테네에는 전염병이 돌게 되었고, 그 결과 인구의 3분의 1이 희생되었다. 그 희생자 가운데 한 명은 바로 페리클레스 자신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페리클레스가 가장 확신했던 병력 수의 우위가 위태롭게 되면서 전쟁의 향방이 오리무중으로 빠졌다. 또 많은 시민들이 전쟁에서 죽음을 당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한 번 전투를 치를 때마다 2천~3천명의 사상자자가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스파르타와의 전쟁 선포는 페리클레스의 최대 실책이었다.

그리스 아테네 신다그마 광장 길거리 모습
■페리클레스 죽음 이후 아테네의 민주주의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우중정치가 된다. 훌륭한 지도자를 잃은 민중이 방향을 잃고 하향 평준화되면서 의식 수준과 역량이 날로 낮아진 결과로 생기는 정치 형태다. 페리클레스가 죽은 이후 아테네에서 이런 현상을 보여 주는 일이 여러 번 일어났다. 우매한 민중들의 판단력이 때로 얼마나 엄청난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들이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시라쿠사 원정이었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 민회는 정확한 정보도 준비도 없이 시라쿠사 원정을 열정적으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결과는 원정군 전체가 궤멸하는 대참패였다. 그 이후 아테네는 전쟁에 이길 가망성을 거의 잃었다.

또 다른 우매한 아테네 민중들의 결정은 기원전 406년에 일어났다. 그해에 그리스 해군 제독들은 아그리누사이 섬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하여 스파르타 해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곧이어 불어온 폭풍으로 말미암아 바다에 빠진 아군들을 구하지 못했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은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장군들을 고발했다. 이때 마침 그날의 하루 대통령을 맡았던 소크라테스는 이런 고발에 응할 수 없다며 거부권을 행사하지만 흥분한 유가족들은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끝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켜 장군 여섯 명 모두를 처형했다.

끝으로 우매한 군중 정치가 가져온 불행은 기원전 399년에 있었던 소크라테스의 재판이다. 이 재판에서 아테네 시민들은 몇몇 선동꾼에 넘어가 위대한 철학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절제를 모르게 된 민중을 적절하게 다룰 수 없다면 민주주의는 재앙이다. 이런 위협을 직감적으로 느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의 지식인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가 그러하듯 민주주의는 결코 완벽한 정치 체계가 아니다. 다만 그리스인들이 실험해 본 여러 가지 정치 체계 가운데 그런대로 가장 바람직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진정한 문제는 아직도 미완인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현하는가 하는 것이다.

끝으로 그리스어에는 ‘민주주의’란 말이 없다. ‘민중정치’란 뜻의 ‘데모(=민중)+크라티아(=정치)’가 있을 뿐이다. 이 체제에서 민중은 주주가 아니라 진정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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