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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30 23:51 수정 : 2005.01.30 23:51

이라크의 새 정치 주체세력인 된 시아 무슬림은 전세계 10억 무슬림의 15% 정도를 차지하는 소수파다.

이슬람 창시자인 예언자무함마드(마호메트)가 632년 사망한 뒤 이슬람은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라졌다.

수니파는 무슬림 공동체(움마)의 순나(관행)를 추종하는 자들로 정통 무슬림을자처하고 있다.

수니파는 이란과 이라크, 바레인을 제외한 나머지 이슬람 국가들에서 주류파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시아파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를 따르는 자들로, 예언자의후계자인 `칼리파'를 알리 가문에 돌려주려는 운동이 종교 색채를 띠면서 생성됐다.

그 어원도 `알리의 추종자들'이라는 뜻인 `시아 알리'에서 비롯됐다.

예언자 사망 후 칼리파 우스만이 살해되자 알리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알리도 661년 살해됐으며 다마스쿠스 총독 무아위야가 칼리파가 됐다.

알리의 죽음을 계기로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이 시작됐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알력과 경쟁관계는 종종 폭력을 불러왔다.

우마이야와 압바시야 왕조 때 알리의 자손들을 제거하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알리의 장남 하산이 사망했다.

하산의 동생 후세인도 680년 빼앗긴 칼리파위를 되찾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으나이라크의 카르발라에서 참혹하게 살해됐다.

해마다 카르발라에서 진행되는 시아파신도들의 순례는 바로 후세인의 죽음을 기리는 종교 의식이다.

후세인이 최후에 남긴 "명예로운 죽음이 굴욕적인 삶 보다 낫다"는 말에서 오늘날 이슬람의 `순교' 개념이 비롯됐다.

알리와 후세인의 비극적 죽음은 시아파 무슬림들에게 순교와 복수심을 고취시켰다.

시아파의 행동과 종교적 가르침이 비교적 과격하고 때론 폭력적으로 비쳐지게 된 역사적 배경이다.

이라크 시아파가 지향해온 목표는 수니파가 지배하는 체제를 뒤집고 인구비례에맞는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시아 무슬림은 이라크 전체 인구 2천600만명의 60-65%로 다수파이면서도 바트당 집권 30여년간 차별과 박해를 받았다.

이라크 시아파는 바스라와 나자프, 카르발라 등 남동부 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고, 바그다드 외곽 빈민가에도 분포돼 있다.

사드르 시티로 개명된 사담 시티도 100만명의 시아파 신도들이 모여사는 시아파 거점 도시 중 하나다.

지난해 이집트 주간지 알-아흐람 알-아라비는 기존 통계와는 달리 수니파가 이라크 전체 인구 중 53%로 다수파이고, 시아파는 40-45%로 소수파인 것으로 조사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라크 주권 정부가 출범해 정확한 인구조사를 실시하기 전에는 "시아파=다수파"라는 등식을 허물기 어려울 것 같다.

임시정부는 식량 배급카드를 이용해총선 유권자 등록을 했을 정도로 정확한 인구 및 시아-수니파 비율은 베일에 가려져있다.

(카이로/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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