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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9.28 17:28 수정 : 2017.09.28 20:56

1960년 미국 시카고의 ‘플레이보이 클럽’에서 여성 종업원 ‘버니’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는 휴 헤프너. 플레이보이 엔터프라이즈 제공

1953년 창간호에 마릴린 먼로 나체사진 실으며 돌풍
1970년대 700만부 팔리다 최근 80만부로 축소
클럽 열어 ‘버니’ 복장으로 여성 종업원 일하게 해
잠입 취재한 글로리아 스타이넘에게 비난 받기도
2012년 60살 연하 아내와 결혼, 자유분방함 과시
마틴 루서 킹 등 저명 인사 인터뷰·인종차별 반대 일면도

1960년 미국 시카고의 ‘플레이보이 클럽’에서 여성 종업원 ‘버니’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는 휴 헤프너. 플레이보이 엔터프라이즈 제공
세계 최고의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를 창간한 휴 헤프너가 27일(현지시각) 별세했다. 향년 91.

플레이보이 엔터프라이즈는 창업자 헤프너가 2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집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전했다. 헤프너의 아들이자 플레이보이 엔터프라이즈의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인 쿠퍼 헤프너는 “아버지는 미디어 및 문화 선구자로서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았으며, 언론의 자유, 시민권, 성적 자유를 지지하며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회·문화적 움직임을 선도하는 목소리를 냈다”고 애도의 뜻을 밝혔다.

<플레이보이> 창간호
1926년 시카고에서 감리교 신자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헤프너는 일리노이대를 졸업하고 잡지사 등에서 일하다 27살 때인 1953년 12월에 <플레이보이> 창간호를 발간했다. 자기 돈 600달러에 어머니에게 꾼 1000달러 등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펴낸 창간호는 특집으로 편성된 마릴린 먼로의 나체 사진이 화제를 일으키며 5만1000부가 매진됐다. 그 뒤 승승장구한 <플레이보이>는 전성기인 1970년대에는 판매부수가 연간 700만부에 이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자신의 삶을 “억압으로 가득했다”고 표현한 헤프너는 자신의 ‘꿈’을 잡지에만 머물게 하지 않았다. 1960년에는 클럽을 열어 여성들에게 <플레이보이>의 상징인 ‘버니’(토끼) 복장을 입혀 일하게 했다. 수영복 모양의 딱 달라붙는 검은 원피스에 머리엔 토끼 귀 모양, 엉덩이에 토끼 꼬리 모양의 장식을 달고 ‘버니’로 불리며 일하는 여성들의 열악한 근무 여건은 1963년 페미니스트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잠입 취재로 실상이 드러나기도 했다.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는 사진으로 유명해진 이 잡지에는 여성을 대상화시킨다는 비난이 당연히 따라다녔다.

그는 “1000명의 여성과 잤다”고 과시했으며, 2012년 방송에 함께 출연한 60살 연하의 크리스탈 해리스와 결혼했다. 세 번째 결혼이었다.

2012년 휴 헤프너와 60살 연하 아내인 크리스털 해리스와의 결혼식. 당시 헤프너는 86살. 플레이보이 엔터프라이즈 제공
<플레이보이>는 전반적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도, 피델 카스트로나 지미 카터 등 주요 인사들과 인터뷰를 싣기도 했다. 레이 브래드버리나 매거릿 애트우드 등 저명 작가들의 글이 실린 점은 이를 단순한 도색 잡지로 규정하는 것을 어렵게 하기도 했다. 플레이보이 엔터프라이즈는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1950~60년대에 방송 ‘플레이보이의 펜트하우스’에 흑인과 백인을 함께 출연시킨 점 등을 들어 헤프너의 진보적 측면을 강조하기도 했다.

<플레이보이>는 포르노가 범람하고 인터넷이 발달해 잡지시장이 침체되며 2015년 판매부수는 80만부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버니’ 로고를 이용해 의류와 보석류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면서 연간 10억달러(약 1조1485원)를 벌어들이고 있다고 플레이보이 엔터프라이즈는 밝혔다.

김효진 기자 jul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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