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2.06 16:11
수정 : 2017.12.06 21:42
|
5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 바깥에서 한 여성이 러시아 국기를 흔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
세계대전 시기엔 독일 등 전범국 출전 금지
‘아파르트헤이트’ 남아공은 24년간 출전 못해
‘도핑’이 문제된 것도 냉전 때 도핑경쟁 한몫
1960년 올림픽 참가 선수 사망이 직접적 계기
냉전시기 동·서구권 집단 올림픽 보이콧도 횡행
|
5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 바깥에서 한 여성이 러시아 국기를 흔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
러시아의 올림픽 출전 금지를 계기로 역대 올림픽 출전 금지 사례들도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러시아는 도핑 때문에 출전이 금지됐지만, 냉전시대를 비롯해 대부분의 올림픽 출전 금지 및 보이콧은 정치적 이유로 촉발됐다. 도핑을 금지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난 데도 정치 상황이 한몫을 보탰다.
역대 올림픽 출전 금지 처분은 정치적 문제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세계대전 시기에는 전범국들의 올림픽 참가가 거부됐다. 1920년 앤트워프올림픽에서는 1차 세계대전 연루를 이유로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터키, 헝가리, 독일의 출전이 금지됐다. 나머지 4개국은 1924년 파리올림픽 참가가 허락됐지만 독일의 출전 금지는 유지됐다. 독일은 2차 대전 전범국이라는 이유로 1948년 런던올림픽 출전도 금지당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64년 도쿄올림픽부터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아파르트헤이트(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인종차별정책)를 이유로 올림픽 참가가 금지됐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탈레반 정권 아래 여성 억압이 문제가 돼 아프가니스탄이 출전을 거부당했다.
스포츠계에서 도핑이 문제라는 인식이 자리잡은 것도 정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2014년 발간된 <스포츠 세계의 반도핑 정책의 전개과정> 논문을 보면 1960년대 이전 도핑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개인의 ‘선택’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냉전시대 올림픽이 정치 체제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자리 잡으면서 경쟁적으로 선수들에게 약물을 사용하려는 시도가 늘었다. 여기에 196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약물 남용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며 도핑에 대한 경각심이 커졌다. 이에 더해 약학 발전도 선수들이 약물이 훈련보다 쉽게 경기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유혹에 쉽게 빠지게 했다.
이런 가운데 1960년 로마올림픽 사이클 경기에 참가한 덴마크 선수 크누드 에네마르크 옌센이 경기 도중 쓰러져 사망한 것은 스포츠계에 반도핑 정책이 도입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옌센의 혈액에서는 다량의 암페타민이 검출됐다. 올림픽위원회는 1967년 산하 의무위원회(IOC-MC)를 중심으로 반도핑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올림픽위원회는 1968년 그르노블동계올림픽부터 약물 복용에 대한 검사를 실시했지만, 도핑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 육상 100m 경기에서 미국의 칼 루이스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한 캐나다의 벤 존슨의 도핑 사실이 발각돼 3일 만에 금메달을 박탈당한 것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검사 기술 발전으로 도핑 적발이 늘기도 했다. 최근에는 이전 올림픽 때 채취한 샘플도 재검사해 추후에 도핑 사실을 밝혀내기도 한다. 지난해 올림픽위원회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및 2012년 런던올림픽 때 채취 샘플을 검사해 수십 건을 추가로 적발하기도 했다.
출전이 불허돼서가 아니라 정치적 항의 표시 등으로 올림픽 출전을 거부하는 보이콧 사례도 많았다. 이번에 평창동계올림픽 출전 금지 처분을 받은 러시아도 개인 자격 참가까지 하지 않는 보이콧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냉전 시대엔 정치적 대립이 극심했던 만큼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이 1960년 로마올림픽 이후 보이콧이 없었던 첫 대회일 정도로 보이콧이 없는 올림픽이 더 희귀했다. 가장 잘 알려진 올림픽 보이콧은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때 소련의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항의 표시로 미국 주도로 60여개국이 불참한 사례다. 소련은 4년 뒤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때 동구권 10여개국과 함께 불참해 이를 되갚았다.
이어 1988년 서울올림픽은 8년만에 동구권과 서구권이 함께 참석하는 올림픽이 됐지만, 공동개최 무산 등의 이유로 북한은 참석을 거부했다. 북한은 하계올림픽 ‘데뷔’도 보이콧으로 시작했다. 1964년 인스부르크동계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북한은 이후 1964년 도쿄올림픽, 1968년 멕시코시티올림픽 출전을 거부했다. 북한의 불참은 당시 북한 최고의 육상선수 신금단의 출전 불허 및 남한이 올림픽 국호 ‘코리아’를 선점한 상황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라 ‘노스코리아’라는 국호가 부여된 데 대한 항의 표시로 여겨졌다. 북한은 1972년에야 희망하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호를 획득하고 올림픽에 참가하게 됐다.
김효진 기자
july@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