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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폴리네시아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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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주민 수백명 암 걸려… “대기권 실험 원전 폭발 수준”
기밀문서 공개에도 프 정부 “안전” 발뺌만
노동자·유가족모임 진상 요구
핵실험 후유증 ‘타히티 섬’
남태평양의 짙푸른 바다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으로 이뤄진 ‘열대의 낙원’ 프랑스령 폴리네시아가 서서히 끓어오르고 있다. 30년을 이어져온 프랑스의 핵 실험은 1996년 1월로 막을 내렸지만, 어두운 과거가 만들어 놓은 추악한 현실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한겨레>는 지난달 26~27일 타히티에서 핵 실험이 가져온 파국과 이를 치유하려는 현지 시민사회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뜨겁게 달궈진 열대의 태양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무더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지난달 26일 낮 12시께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수도인 타히티의 파페에티 거리에선 채 10분을 서 있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차량들은 도심의 ‘살인적인 물가’를 피해 점심식사를 하러 도시 외곽으로 빠져 나가는 행렬이었다. 세계적 관광지로 이름난 ‘열대의 낙원’ 타히티의 거리는 치열한 삶의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1966년 7월 시작된 프랑스의 핵 실험은 폴리네시아 사회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물밀듯 밀려 들어온 ‘핵 경제’는 자급자족의 전통 경제를 뒤흔들어, 농산물까지 수입에 의존하는 기형적 경제구조로 바꿔놓았다. 수많은 이들이 손 쉽게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핵 관련 시설에서 일하기 위해 타히티에서 남서쪽으로 약 1천km 떨어진 외딴 산호섬 모로루아와 팡가타우파로 몰려들었다. 알프레드 파우테헤아도 그들 가운데 1명이다.
파우테헤아는 1968년부터 1979년까지 만 12년을 모루로아 핵 실험장에서 중장비 기사로 일했다. 4년 여 전 친구들과 야생돼지 사냥에 나섰던 그는 숲을 헤매다 다리를 다쳤다. 상처는 두 달이 지나도록 아물지 않았다. 혈액검사를 한 의사는 뜻밖에 ‘토토페’(백혈병을 일컫는 타히티어로 ‘죽은 피’라는 뜻)라는 진단을 내렸다.
25만여 인구의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선 매년 500~600명에게 암 진단이 내려지고, 250명이 그로 인해 숨진다.
의료진은 ‘방사능 노출에 따른 직업병일 가능성이 있다’는 진단서를 발급했지만, 프랑스 정부는 “핵 실험장은 안전하기 때문에 직업병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공문만 보내왔다. 2002년 11월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하면서 “핵 실험이 안전했다면, 내 백혈병은 어디서 온 것이냐”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던 그는 결국 지난해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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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동안 핵 실험장에서 중장비 기술자로 근무했던 알프레드 파우테헤아가 죽기 전에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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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페에티 중심가에 있는 시민단체 ‘모루로아 에 타투’(모루로아와 우리)를 찾았다. 2001년 7월 결성된 핵 실험장 노동자 출신과 그 유가족 등 4324명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 단체는 지난 7월 말 폴리네시아 자치의회가 ‘1966~74년 핵 실험 영향 조사위원회’(이하 위원회)를 구성하는 데 산파 노릇을 했다. 이 단체 롤랜드 올드햄 대표는 “최근 프랑스 정부가 군 병력을 파견해 방치돼 있던 핵 실험장 주변 섬의 관련 시설물을 철거하려다 외부에 알려지자 중단한 일이 있다”며 “40년 가까이 핵 실험의 안정성을 강조해 오더니 위원회 활동이 본격화하자 돌연 관련 시설물 철거에 나서며 프랑스 정부가 내세운 명분은 기껏 ‘관광산업에 좋지 않다’는 주장이었다”고 말했다.
1966년 7월2일 타히티에서 남동쪽으로 약 1천km 떨어진 모루로아 환초에서 첫번째 대기권 핵 실험이 벌어졌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군 장성과 정치인 등 귀빈들이 핵 실험장에서 약 400km 떨어진 갬비어 군도의 망가레바 섬으로 모여들었다. 성공적으로 끝마친 첫번째 실험을 기념하는 만찬을 기다리던 참관자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병사들의 안내에 따라 황급히 섬을 빠져나갔다.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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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루로아 에 타투’의 정책실장인 존 타로아누이 둠이 당시 핵 실험장에서 근무한 노동자들의 건강기록부를 펼쳐 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파피에테/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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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약 39년 만인 지난 5월 중순 비밀로 묶여 있던 당시 기밀 문서 일부가 공개되면서 속사정이 드러났다. 이 단체 존 타루아로이 둠 정책실장은 “당시 실험이 끝난 뒤 대기 중에 노출된 방사능 수치가 예상보다 높았다”며 “구름이 낮게 깔린 데다 강한 바람이 망가레바 쪽으로 불고 있다는 긴급 보고가 들어오면서 귀빈들이 대피를 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험장 인근 갬비어 군도의 투레이아와 망가레바 등 4개 섬 주민 1200명은 아무런 경고도 듣지 못했다.
현지 군 당국은 이런 사실을 현지 주민들에게 알리거나 별도의 안전조처를 취하는 것을 금지시킨 뒤 상황 파악을 위해 자체 조사단을 파견했다. 실험 나흘 뒤 망가레바 최대 마을 리키테아에 도착한 조사단의 분석결과, 씻지 않은 야채에선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건 당일과 같은 수치인 1g당 1만8천 피코큐리의 방사능 물질이 검출됐다.
둠 정책실장은 “프랑스 군 당국과 원자력위원회(CEA)는 핵 실험이 완전히 해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방사능안전국(SMSR)은 주민을 대피시킬 필요가 있다는 제안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하지만 주민을 대피시킬 경우 언론이 알아챌 것이고, 이는 ‘정치-심리적 측면에서 불가능한 선택’이란 판단이 내려졌다”고 말했다. 심지어 당시 활동을 마친 군 조사단은 비밀 보고서에서 “주민들에게 노출된 방사능의 양에 대해선 실제 수치보다 최대한 줄여서 말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의도적 방관과 왜곡의 역사가 공개되자,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프랑스 정부는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맞섰지만, <리베라시옹>과 <르피가로> 등 프랑스 현지 유력 일간지까지 숨겨졌던 추악한 과거를 잇따라 보도하면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결국 지난 7월 말 폴리네시아 자치의회는 자체 진상조사 회를 구성하고 공식 활동에 들어갔다. 올드햄 대표는 “핵 실험 개시 40주년을 맞은 내년은 모로루아와 팡가타우파 핵 실험장을 둘러싼 감춰진 진실을 밝히고, 프랑스 정부의 역사적 책임을 묻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산호섬 2곳서 30년간 193차례 핵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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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년 모루로아 환초에서 실시된 프랑스 핵 실험. 타히티/AFP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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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후 ‘위대한 프랑스의 재건’에 골몰한 샤를 드골 대통령이 찾아낸 해답은 핵 무장이었다.
프랑스의 첫번째 핵실험은 1960년 2월13일 아프리카의 식민지 알제리에서 시작됐다. 1962년 알제리가 독립을 선포한 뒤에도 남부 사하라 사막의 레카네와 인 에케르 지역에서는 1966년 2월16일까지 4차례의 대기권 실험을 포함해 모두 17차례 핵 실험이 실시됐다.
알제리의 독립으로 새로운 핵 실험 장소를 물색하던 프랑스 정부는 자국령 폴리네시아의 외딴 산호섬 모루로아와 팡가타우파 두 곳을 선택하고, 타히티에 국제공항을 건설하는 등 핵 실험 준비에 들어갔다. 1966년 7월2일 첫 실험이 시작된 이래 1996년 1월27일 마지막 실험을 하기까지 30년 동안 193차례 이 지역에서 핵 실험이 실시됐다. 41차례 대기권 실험을 포함해 모루로아에서만 모두 178차례 핵 실험이 진행됐고, 규모가 큰 실험이 주로 실시됐던 팡가타우파에선 대기권 실험 5차례와 지하 실험 10차례 등 모두 15차례 핵 실험이 이어졌다. 그린피스 등 환경단체들은 핵실험에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였고, 프랑스 정보국은 1985년엔 그린피스의 ‘레이보우워리어’호를 폭파침몰시켜 세계여론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1992년 핵 실험 유예를 선언했던 프랑스 정부는 1995년 “더 이상 핵 실험을 실시할 필요가 없도록 컴퓨터 모의실험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라며, 핵 실험 재개를 발표해 국제사회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그 해 9월 타히티에선 젊은이들이 공항에 불을 지르는 등 폭동을 벌이기도 했다. 예정됐던 8차례 실험 가운데 6차례 실험을 이듬해 1월 끝마친 프랑스 정부는 핵 실험의 종식을 선언했다. 이어 같은 해 2월엔 폴리네시아 지역의 핵 실험 시설을 폐쇄하기로 결정했으며, 9월엔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에 서명하기에 이른다.
핵 실험 실시에 앞서 프랑스 정부가 1964년 2월 폴리네시아 자치정부와 맺은 협정에 따르면 모루로아와 팡가타우파 환초에서 핵실험이 종료되면, 지체 없이 폴리네시아 자치정부에 돌려주기로 돼 있다. 하지만 1996년 핵 실험 종료를 선언한 뒤에도 핵 실험 장소 두 곳에 방사선 및 지질학 감시시설을 설치했으며, 여전히 프랑스 군사지역으로 분류돼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현재 모루로아에는 프랑스군 30명 가량이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핵 노동자 입 열기 시작… 진실은 감출수 없다”
[인터뷰] 핵실험 영향조사위원회 바릴로 전문위원
폴리네시아 자치정부 산하 ‘1966~74년 핵 실험 영향 조사위원회’(이하 위원회)에서 보고서 집필 책임을 맡고 있는 브루노 바릴로 전문위원은 “숨겨진 진실은 언제고 드러나는 법”이라며 “프랑스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을 즈음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톨릭 사제 출신인 바릴로 전문위원은 지난 1984년 프랑스 남부 리옹에서 ‘평화갈등문제연구소’를 창립한 이후 줄곧 폴리네시아의 반핵운동을 지원해왔다. 지난 26일 파페에테 중심가 기독교회관 1층에서 그를 만나 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물었다.
-위원회는 어떻게 구성돼 있나?
=지난 7월 초 폴리네시아 자치의회에서 결의안이 통과됐고, 같은 달 29일 공식활동 들어갔다. 현장 방문과 면접조사 등 내년 1월28일까지 6개월 동안 조사활동 벌이게 되는데, 조사대상 기간은 대기권 핵 실험이 진행된 1966년부터 1974년까지다. 이와는 별도로 정부와 의회, 시민사회에서 각 3명씩을 파견해 폴리네시아 자치정부 안에 상설기구를 구성해 위원회의 조사결과를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했다.
-프랑스 정부의 반발이 컸을 텐데.
=자치의회가 결의안을 통과시킨 직후 프랑스 총독이 강력한 유감의 뜻을 밝히고, 행정법원에 '위원회 구성은 불법'이라며 소송까지 냈다. 하지만 법원이 위원회 창설 자체는 문제될 게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위원회의 활동 결과가 군사정보 비밀유지 원칙 위배되는 경우가 있을 시에 불법일 수 있다는 애매한 판결을 내려 향후 논란의 불씨는 남아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벌이고 있나?
=위원회의 활동은 핵 실험과 관련해 폴리네시아에서 나오는 첫번째 공식 기록이라는 점에 의미가 크다. 핵 실험장 노동자 출신 등 개인 피해자와 당시 실험 관련 활동에 종사한 이들의 증언을 광범위하게 듣고 있다. 위원회는 크게 의료-경제-환경 3분야로 나눠서 활동하고 있는데, 조사활동에서 얻은 각종 자료는 정보센터를 만들어 영구 보존할 계획이다.
-프랑스 군 당국의 협조가 중요할 것 같은데.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대기권 핵 실험이 진행된 1966~74년 군이 파악한 기상정보를 공개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 마저 군사기밀이라며 내주지 않고 있다. 폴리네시아 기상당국에도 아무런 정보가 남아있지 않고, 심지어 당시 방송 프로그램 테이프까지 파리에서 보관하고 있다. 물론 다른 경로를 거쳐 필요한 정보를 구하기는 했다. (웃음) 대기권 중 핵 실험은 사실상 폴리네시아 전역에 영향을 끼쳤다는 방증을 확보했다.
-조사활동 시한이 벌써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최종 보고서는 프랑스 정부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내용이 될 것이다. 당연히 취해야 할 보호조치가 전혀 취해지지 않았다. 보고서가 완성되면 내년 2월 타히티와 파리에서 동시에 공개할 예정이고, 자치의회 대표단이 파리 의회를 방문해 피해자 보상대책 마련과 진상조사 위원회 구성을 제안할 계획이다. 오랜 세월 입을 닫고 있던 핵 실험장 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파페에테/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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