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06 18:51
수정 : 2005.02.06 18:51
<이코노미스트>는 얼마 전 미국 밖에서 태어난 시민들도 미국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세계화의 시대에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이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시민을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놀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며 차기 대선주자로까지 거론되고 있는 상황도 이러한 논의의 불길을 지핀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터미네이터’는 최근 세계 최대의 연기금인 ‘캘리포니아주 공무원퇴직연금’(캘퍼스)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캘퍼스를 이끌어 왔던 숀 해리건 사장이 연임에 실패했는데, 공화당 소속의 주지사가 재계의 사주를 받아 캘퍼스 인사위원회를 움직였다는 것이다. 물론 주정부 당국은 다섯명의 인사위원 중 슈워제네거 주지사가 임명한 사람은 한 명에 불과하다며 음모론을 부인했다. 그러나 캘퍼스가 그동안 ‘주주 행동주의’를 표방하며 경영자 중심의 대기업 지배구조를 집요하게 공격함으로써 재계쪽 인사들을 곤혹스럽게 했으며 부동산 개발업자 출신의 론 알바라도가 후임으로 내정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번 사태에는 주지사의 의지가 적지 않게 들어가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공화당 소속 주지사가 해리건을 축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캘퍼스가 사회적 영향력 확대에만 지나치게 몰두한 채 수익자(beneficiaries)의 재산을 지키는 본연의 임무는 소홀히 했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비판자들은 캘퍼스가 식료잡화체인인 ‘세이프웨이’에서 일어난 파업을 적극 지원하고 최고경영자의 해고에도 앞장섰던 사실을 거론하면서, ‘주주 행동주의’가 ‘노동운동’으로 변질되었다며 비판의 날을 세운다. 더욱이 해리건 자신에게는 파업 주도 노조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권력남용의 혐의까지 더해졌다. 그러나 대형연기금과 소비자단체는 해리건의 축출이 금융시장의 근본적인 공정성을 훼손하고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려는 반대세력의 쿠데타라며 인사위원회에 항의서한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번 논란은 결국 연기금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에 대한 입장 대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캘퍼스의 ‘신인의무’(fiduciary duties)는 수익자의 재산을 보호하고 그 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신중투자’로 국한되어야 한다는 것이 주지사쪽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해리건쪽은 2천억달러에 육박하는 엄청난 자산을 운용하는 캘퍼스가 지역사회와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사회적 투자’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슈워제네거의 주지사 당선이나 부시의 재선이 보여주고 있듯 미국사회는 지금 빠르게 보수화되고 있다. 이에 발맞추어 부패한 경영자를 어떻게 응징할 것인가라는 지난 몇년간의 문제의식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에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기업경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해리건의 퇴진 역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앞으로 캘퍼스가 기업감시의 눈길을 누그러뜨리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꿀지, 그렇게 될 경우 기업의 경쟁력은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 눈여겨 볼 일이다. 영화 속의 터미네이터는 미래로부터 날아와 미래를 구했다. 과연 슈워제네거 주지사는 캘퍼스 개혁을 통해 미국의 미래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박종현/국회도서관 금융담당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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