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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0.14 20:55 수정 : 2007.10.14 20:55

주일미군 주요기지

[주일미군과 시민사회] (상) 정보를 갖고 싸운다-평화단체 ‘피스데포’

동아시아·태평양지역에 전개된 미군 병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일미군과 주한미군의 규모는 집계기준에 따라 제법 차이가 난다. 일본 방위핸드북(2006판)에는 주일미군이 3만5307명, 주한미군이 3만2744명으로 잡혀 있으나, 미군 태평양군사령부 홈페이지에는 약 5만4천명과 3만7500명으로 돼 있다. 일본이 7함대의 해상전개 병력을 집계범위에서 제외하는 반면 미국은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은 육군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으나, 주일미군은 해·공군·해병대가 많고 병기의 질과 규모에서도 훨씬 앞선다. 일본 시민사회가 안보정책을 둘러싼 논의의 투명도를 높이기 위해 주일미군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수집 관리 공개하는지를 소개한다.

편집자

정확한 자료 바탕 ‘이기는싸움’…군축운동 ‘한획’
해상자위대 ‘미항모 급유량’ 축소 확인 성과도

‘피스데포’ 우메바야시 히로미치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대테러전쟁에 협력하기 위해 인도양에 파견된 일본 해상자위대 보급함이 이라크 전쟁 개전 직전인 2003년 2월 미국의 항모 키티호크에 간접공급한 급유량이 일본 정부의 발표보다 4배 많았다는 의혹이 지난달 20일 일본의 시민단체에 의해 제기됐다.

이 단체는 또 키티호크가 급유를 받은 뒤 바로 걸프만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급유지원을 아프가니스탄 테러대책으로 한정한 특별조처법을 위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다음날 급유량의 입력과정에서 사무착오가 있었다고 잘못을 바로 인정했다. 자위대 보급함이 공급한 연료가 이라크전에 전용됐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일본 국회에서 열띤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기밀에 휩싸이기 마련인 군사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를 삼은 주역은 비영리법인인 ‘피스데포’이다. 피스는 평화이고 데포는 저장소, 창고를 뜻한다. 피스데포가 미 해군함정의 항해일지 등을 분석해서 폭로를 하기 사흘 전 우메바야시 히로미치 대표(70)를 요코하마의 사무실로 찾았다.


그의 경력은 좀 독특하다. 도쿄대학에서 자장물리학을 전공했고 공학박사 학위를 갖고 있다. 70년대 초반 베트남전 반전운동에 열심히 참여했던 그는 ‘시민과학자’로서의 삶을 고민하다 평화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1980년 도립공대 교수직을 버렸다. 80년대 중반 미국이 순항미사일 토마호크를 서유럽에 이어 태평양에 배치하려는 데 맞서 반대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정보공개법이란 제도와 마주 친 것이 그의 인생의 새로운 전기가 됐다.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활동가, 연구자들과 함께 ‘태평양군비철폐운동’이란 단체를 만들어 교류하면서 군사문제에 관한 이들의 전문적 지식 수준에 감명을 받았다. 당시 일본의 운동은 입항하는 모든 미국 함정에 핵무기가 실려 있다는 전제 아래 항의시위를 벌였기 때문에 초점이 흐려졌다.

미국의 군사문제 전문가 윌리엄 아킨이 정보공개법을 활용해서 자료를 입수해 분석을 하면 어느 군함에 토마호크 미사일이 탑재됐는지 상당히 좁혀갈 수 있다고 조언을 해주었다. 모든 함정에 관성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된 정보를 바탕으로 특정 함정에 항의운동을 집중하는 방식은 언론의 관심을 끄는 데도 아주 유효했다.

우메바야시는 “정보공개법은 신청자의 국적을 묻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재일미군기지를 철저히 조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처음 정보공개를 청구했을 때 ‘문화충격’을 강하게 느꼈다고 표현했다. 미국의 담당자가 아무 선입감 없이 정보공개법의 정신에 따라 실무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 정부가 군사관련 정보를 거침없이 공개하는 것은 아니다. 비밀로 분류된 정보에는 ‘최상급 비밀’ ‘비밀’ ‘공용 한정’ ‘외국인 배제’ 등 여러 등급이 있으나 일단 비밀분류에서 해제된 것은 원칙적으로 공개를 한다.

그는 이런 과정을 통해 입수한 방대한 미군기지 자료를 토대로 〈정보공개법으로 파악한 주일미군〉 〈정보공개법으로 파악한 오키나와의 미군〉 〈감춰진 핵사고〉 등의 저서를 냈다. 미국의 공문서를 통해 주일미군의 실태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책은 처음이어서 당시 방위청(현재 방위성)이 들어가 있던 건물의 서점에는 이 책들을 수북히 쌓아놓고 팔았다고 한다.

정보를 바탕으로 한 연구활동의 중요성을 몸으로 느낀 그는 시민의 힘으로 전문연구소를 만들자는 발상을 추진한다. 일본의 평화운동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피폭경험과 평화헌법을 토대로 시작됐지만, 대체로 이데올로기 운동이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반미와 반공이 대립하는 속에서 평화운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특정정당과 노동조합에 아주 가깝거나 재정적으로 의존하는 바가 아주 컸다.

주일미군과 시민사회
그래서 정당이나 노조의 입김에서 벗어난 연구소를 만들자는 취지로 일반시민의 성금을 모아 ‘평화자료협동조합’ 준비회를 1990년 말에 발족시켰다. 7년 간의 준비 끝에 협동조합이 정식으로 출범했고 2000년 1월 피스데포로 이름을 바꿨다.

인력은 현재 전임직원 2명, 시간제 2명으로 아주 빠듯하다. 기관지를 정기 구독하는 사람이나 단체는 수는 약 800명 정도다. 젊은 후계자를 키우고 안정적 재정운영 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한국의 평화운동에 대해서는 연구분야가 약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 아직도 현장을 떠나지 않은 시민과학자의 조심스런 평가다.

요코하마/글·사진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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