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총리(당시)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하「북측」이라고 합니다.)의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 위원회 위원장과 회담을 가졌습니다.(조일 정상회담) 그 자리에서 북측은, 일본인13명을 납치한 것을 인정하고 사죄했습니다. 그 후, 2002년 10월 15일, 5명의 이른바 납치 피해 생존자의 일시 귀국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5명의 귀국후, 일본 정부는 매스컴을 이용해 반북 여론을 일으키고 보수 우익의 지원을 받는 이른바,「납치 피해자 가족회」라는 단체가 크게 반발을 해 일시 귀국한 5명의 귀환을 거부하게 됩니다.이에 대해 북측은「일본 정부의 약속 위반이다」라고 크게 반발하게 되어 조일 교섭문제는 중단되게 됩니다.그후 일본에는 반북 바람이 휘몰아치며,북측 때리기가 일상화되고,이런,상황을 적절히(?)이용해 정책도 능력도 비젼도 없는 아베씨가 총리에 취임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들 5명이 일본에 일시귀국해 옛날 집등을 둘러보고 하는 중에도 주목할만한 것중 하나가 이들이 [김일성뱃지]를 떼지 않고 있던것입니다.매스컴에서는 이것을 부각하며 세뇌를 받아 그렇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이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북측과 일본과의 합의로 이들이 일시귀국해 다시 북측으로 돌아가 북측에 있는 가족과 이야기를 해서 어느쪽에서 살것인가를 결정하는등 자유의사를 존중하기로 했으며, 그사이에 북일간의 교섭으로 상호간에 대표부를 두어 본격적인 납치문제 조사에도 협력하기로 되어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뱃지를 뗄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5명중 한명은 북측의 정보기관에서 대일본 업무를 담당하는 간부가 되어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그리고 이른바 납치 피해자들 중에는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선만으로 자진해서 입국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냉전체제 이래,북측과 일본은 국교도 없고, 평화조약도 체결하지 않은 상태로써,이른바「교전상태」의「적국」입니다. 납치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비극이었습니다. 이른바〈유골 문제〉 이른바,납치문제 피해자 가운데 가장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실제,납치 피해자가족회의 회장이었던 요코타씨의 딸인 요코타 메구미에 대한 귀국 요구가 커지면서 북측은 요코타 메구미씨가 병으로 자살을 했다고 발표,일본정부의 강한 요구로 그 유골의 일부를 일본 정부에 보내게 됩니다. 유골을 넘겨 받은 일본정부는 과학 경찰 연구소,테이쿄대학 연구소에 유골의 DNA 감정을 의뢰하고, 결과 이 유골은 요코타메구미의 유골이 아닌 타인의 유골 , 즉 가짜유골이라고 발표합니다. 이에 대해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 처럼 일본 매스컴은,북측을「사람의 유골가지고도 장난을 치는 극악 무도한 집단」으로 대대적인 선전과 비난을 하게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데서 터지게됩니다. 유골 감정을 맡은 테이쿄 대학 요시이씨가 영국의 과학지「네이쳐」와의 인터뷰에서, 「유골에서는 요코타메구미 본인의 DNA가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 뿐이며, 이것만으로 가짜라고 단정 할 수는 없다 」 라고 말합니다.그리고 또 다른 감정 기관인 과학 경찰 연구소에서는「판정 불능」이라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리고 외국의 감정 전문가들은「유골은 화장 된 것이어, DNA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며, 테이쿄 대학에서 검사할 당시 많은 연구원들이 이 유골을 만지작 거려 시료가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도 지적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유골의 일부가 열에 충분히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DNA가 잔존하고 있었다 라고 주장했으며, 거기에 대해 다시 검사를 하는것이 어떤가 라는 의견에 대해서 감정을 하느라고 다 써 버려, 유골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매스컴의 주목을 받게된 테이쿄대학 연구원은 그 뒤 갑자기 경시청으로 발령이나, 경찰 공무원이 되었습니다.그래서 일체의 인터뷰등을 거절하고있습니다. 그리고 네이쳐지의 보도가 나온후, 중의원 의원인 스토우 노부히코씨가 이 문제을 국회에서 추궁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일개 잡지의 기사는 논평할 가치가 없다.」,「네이쳐의 기사는 부적절하다.」,「기사는 일반론이며, 이번 경우를 특정하고 있는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대해, 네이쳐지는 2005년 3월 17일호에 논설 「정치와 진실의 대결」을 게재하고, 「일본의 정치가들은, 아무리 난처해도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을 바로 봐야한다.그들은 북측과의 투쟁에 대해 외교적 수단을 위해 과학적 정합성을 희생에 해서는 안된다」라고 일본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한편, 반북바람 속에서 혼자 진실을 밝힐려고 노력한 스토우의원은 그후 우익과 매스컴의 협박과 집중포화를 맟게 됩니다. 〈동북아 평화 체제와 일본〉 저는 이른바 납치문제를 호도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진실도 정치적인 협상에도 외면을 하는 일본의 정책이 과연 동북아의 안정을 바라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김정일위원장과 고이즈미수상이 발표한 평양선언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선언입니다. 동북아에 있어서의 전후의 결산, 냉전체제 종식을 위한,또는 평화의 정착을 위한 기본적인 한걸음이 되는것이었습니다. 김정일위원장이 북측에서 어떤 지위라는것은 여러분들도 잘 아실것입니다.고 김일성주석 사후,실질적인 북측의 통치자로써 그는 법률과 제도의 위에 군림하는 존재입니다. 그런 인물이 이른바 납치 문제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하고 조사협력을 약속했습니다.북측에서 보자면 어떤 더이상의 정치적 협상의 여지가 없는 최후의 카드를 꺼낸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대해 「배신」하고「조롱」했습니다. 일본이 주장하는「납치문제의 해결」이란 무엇입니까? 역사와 배경이 다르지만, 해방전 일본 제국주의는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강제연행하고 납치하고 살상했습니다. 이것은 해방후 6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새로운 사실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득할 정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교 정상화를 해, 외교 기관을 두고 필요하다면 국제법에 준한 외국의 조사단과도 협력해 조사를 하고 진실을 찾아내는것이 원칙입니다. 일본에 돌아온 5명의 사람들은 북측에 두고온 가족이 있습니다. 또 새로운 이산가족이 생긴것입니다. 이런것들에 대해서도 일본정부는 무조건 돌려보내라고만 주장하고있습니다. 일본은 전쟁후 지금까지 미국 일변도의 외교를 해오며, 그 안보 우산 아래서 아시아에 대해서는 미국의 국익에 맟게 보조를 맟춰 행동해 왔습니다. 그 결과 제국주의의 반성과 전후 청산은「없던일」이 되어버렸습니다. 한반도(조선반도)가 아시아가 냉전하에서 분열하고 혼란한 상황에서 괴로운 역사를 보낼때 미국의 안보우산 아래서 돈 버는데 만 주력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일본의 수상이라는 사람이 한국전쟁을 가리켜 일본을 위해「천우신조,하늘이 도와주신 기회」공언을 할정도였습니다. 조미간에 대화 재개, 테러 지원국해제가 시작되었습니다.일본은 북측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는한 진정한 전후 청산도 어려우며 새로운 동북아 질서에 참가하는것도 힘들 것입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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