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1.03 18:38
수정 : 2008.11.03 18:38
다모가미 항공막료장 논문 전문
군국 일본을 침략국가로 보는 것은 적반하장격의 누명이고 모함이다. 한국의 독립을 비롯한 2차대전 이후 아시아·아프리카의 숱한 민족해방(식민지배로부터의 독립)은 일본이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 열강과 싸운 덕에 달성될 수 있었다.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와 중국 점령은 합법적 토대 위에 이루어진 정당한 것이었다. 일본이 중국을 공격한 것은 합법적 절차를 거쳐 중국대륙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 대해 장개석 군이 끊임없이 불법적인 테러를 가하고 사기를 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반격한 것이며, 그 때문에 일본은 원치않는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다. 생각해보라, 지금 일본에 미군이 안보조약에 따라 주둔하고 있는데, 일본 자위대가 그 미군기지들을 공격하고 미군을 살상한다면 미국이 가만 있겠는가? 일본이 조선과 중국대륙을 무력공격한 것은 그와 같은 이치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테러로 규정하고, 그 때문에 일제가 어쩔 수 없이 원치않는 한반도 강제합병에 나섰다고 주장하는 일본 식자들도 많다.)
이런 황당한 주장을 공개적으로 늘어놓은 일본 항공자위대 다모가미 도시오(田母神俊雄·60) 항공막료장(공군참모총장)이 경질됐다.
놀라운 것은 그의 경질이 아니라, 그런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그 오랜 세월 일본 자위대에서 출세를 거듭해왔다는 사실이고 그 최고위직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일본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명징한 사례다. 그를 경질한 아소 다로 정권 핵심 각료들이 실은 다모가미와 같은 생각의 소유자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아소 총리부터 그렇다. 다모가미의 그런 생각은 우리가 그 동안 귀에 익도록 들어온 일본 우익단체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아소 총리야말로 새역모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고 지금도 그렇다.
다모가미는 이런 헛소리를 ‘일본은 침략국가였나?’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정리했다. 이 논문은 호텔 운영, 맨션 건설·분양으로 많은 돈을 번 모토야 도시오라는 자가 대표이사 사장으로 있는 아파(APA) 그룹이 내건 ‘진정한 근현대사관’ 현상공모에서 최우수상(상금 300만엔)을 받았다. 다모가미 목이 날아간 것은 이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매스컴에 알리며 법석을 떤 결과다. 그 공모전엔 다모가미 외에도 다수의 자위관들(자위대 장교들)이 응모했다. 모토야 사장은 아소 총리와 함께 일본 정계의 대표적 우익인사인 아베 신조 전 총리 후원회인 ‘아신카이(安晋會)’의 유력멤버다.
다모가미의 놀라운 사고는 결코 돌출적이지도, 예외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오늘날 일본 정계, 재계, 학계, 관료조직, 군부 통털어 일반적 사고에 가까운 것이다. 다모가미가 경질당한 것은, 탤런트 기질이 있는 그가 젊은 개그맨들처럼 인기발언을 남발해온 데 대해 평소부터 우려해온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부적절한 때에 부적절한 장소에서 부적절한 방식으로 속내를 털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의 평소 처신을 걱정해온 사람들도 결코 그의 생각 자체가 잘못됐다는 얘긴 하지 않았다. 다만 조심하지 않는다고 질책했을 뿐이다.
저들이 정신병자라는 건 이미 주지의 사실이었으나, 그 정도가 구제불능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이번 사건은 다시 한번 확인해주었다. 공군참모총장의 사고 수준, 세상을 보는 눈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한심한 일본 현실, 그것을 유력 기업이 최우수작품으로 뽑고 3000만원의 상금까지 주는 수준이하의 짓거리를 그냥 돌발적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저들의 저 몸서리치는 지독한 자기애와 비뚤어진, 아무 근거없는 선민의식을 보라. 그 수준이하들이 저토록 엄청난 파워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오싹한 공포를 느껴야 정상이 아닐까. 반세기 전 수천만명을 살륙한 그 전쟁이 어떻게 해서 시작됐던가.
아래에 다모가미 도시오의 그 문제의 논문 전문을 번역해 싣는다.
정신병의 정도가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는 다모가미 자신의 말을 직접 들어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엔 한국의 뉴라이트 주장을 함께 떠올리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한꺼풀만 벗겨 보면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아찔하게 닮아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논문을 읽어가다가 다모가미의 주장이 그럴 듯해 보이거나, 어디가 잘 못 된 건지 잘 구분이 가지 않는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설마 그러기야 할까만은) 설사 그렇다 해도 별 이상할 게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실 광복 이후 지난 반세기 이상 오히려 그게 정상인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살아왔다. 세상이 얼마나 뒤집혀 있는지에 대해 상상하기조차 힘든 세상에서 살아왔다.
다모가미를 비롯한 일본 우익은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서구 제국주의 열강도 마찬가지라는 논리로 일본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빤한 숫법을 쓰고 있다. 미국이 제국주의 국가요 악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많은 한국인들은 따라서 자신들이 미국과 다를 바 없다거나 오히려 그 피해자라고 우기는 일본 우익의 논리 어디가 잘못됐는지 헷갈릴지도 모른다. 강도살인범들끼리 전리품을 두고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싸웠는데, 결국 힘이 모자라 다 빼앗긴 자가 빼앗아간 자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는 건 그들끼리의 일이니 상관없지만, 빼앗아간 놈이 나쁘다고 해서 전리품을 다 빼앗긴 강도가 자동적으로 선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어느 놈이 빼앗고 빼앗기든 그들은 모두 나쁜 놈들이다. 게다가 애초에 그 물건들을 빼앗긴 약자들을 향해 자기도 같은 피해자라거나, 실은 자신이 그 약자들을 위해 다 빼앗아간 놈과 싸웠다고 뻔뻔스럽게 주장하기까지 한다면 죄질은 최악이다.
어쨌든 다모가미로 상징되는 오늘날 일본 우익 지배세력의 세계관을 그들 자신의 얘기를 통해 확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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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모가미 항공막료장 논문 전문]
일본은 참략국가였나? / 다모가미 도시오
미국 군대는 미일 안전보장조약에 따라 일본 국내에 주둔하고 있다. 이것을 미국의 일본침략이라고 하진 않는다. 2국간에 합의한 조약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2차대전 전에 중국대륙과 조선(한)반도를 침략했다고 하지만 실은 이들 나라에 대한 일본군 주둔도 조약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는 사실은 의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이후 조선반도와 중국대륙에 군대를 보냈지만 상대국 승인을 얻지 않고 일방적으로 군대를 보낸 적은 없다. 현재 중국정부로부터 ‘일본의 침략’에 대해 집요하게 추궁당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에 따라 국제법상 합법적으로 중국대륙에 권익을 확보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조약 등에 기초해 군대를 배치한 것이다. 이에 대해 압력을 가해 조약을 무리하게 체결케 했으므로 조약 그 자체가 무효라는 사람도 있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소의 압력을 동반하지 않는 조약은 존재한 적이 없다.
이 일본군에 대해 장개석(蔣介石, 장제스, 장카이섹) 국민당은 빈번하게 테러행위를 자행했다. 우리 국민에 대한 대규모의 폭행, 참살사건도 거듭 발생했다. 이것은 현재 일본에 존재하는 미군의 요코다 기지나 요코스카 기지 등에 (일본) 자위대가 공격을 가해 미국 군인과 그 가족 등을 폭행하고 참살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참을성 있게 평화를 추구했지만 그때마다 장개석한테 배신당했다. 실은 장개석은 코민테른 손에 조종당하고 있었다. 1936년 제2차 국공합작에 따라 코민테른 앞잡이인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둥) 공산당 게릴라가 국민당내에 다수 들어가 있었다. 코민테른의 목적은 일본군과 국민당을 싸우게 만들어 양쪽을 피폐케 하고 최종적으로는 모택동 공산당이 중국대륙을 지배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국민당의 거듭되는 도발로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돼 1937년 8월15일 일본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 내각은 “지나(중국)군의 폭거를 응징함으로써 난징(남경)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이제야 단호한 조처를 취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나라는 장개석 때문에 중일전쟁에 휘말린 피해자인 것이다.
1928년 장작림(張作霖) 열차폭파사건도 관동군 공작이라는 얘기가 오래 유포돼 왔으나 최근 소련 정보기관 자료가 발굴돼 적어도 일본군이 했다고 단정할 순 없게 됐다. <마오- 누구도 몰랐던 모택동> (윤지안, 講談社), <황문웅의 대동아전쟁 긍정론>(黃文雄, 와크출판) 및 <일본이여, ‘역사력’을 연마하라>(사쿠라이 요시코 편, 文藝春秋) 등에 따르면, 최근에는 코민테른 공작이라는 설이 매우 유력해지고 있다. 중일전쟁 개시 직전인 1937년 7월7일 노구교(盧溝橋) 사건에 대해서도 이제까지 그것이 일본의 중국침략 증거인 것처럼 얘기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도쿄(전범)재판이 진행되고 있던 중에 중국공산당의 유소기(劉少奇)가 서방쪽 기자와의 기자회견에서 “노구교 사건을 만든 건 중국공산당으로, 당시 현지 지휘관은 바로 나였다”고 증언한 사실을 알고 있다. (<대동아 해방전쟁> 이와마 히로시, 岩間書店) 만약 일본이 침략국가였다면 당시 열강이라 일컬었던 나라들 중에서 침략국가가 아니었던 나라가 어디 있었는지 묻고 싶다. 다른 나라가 했으니 일본도 해도 괜찮다는 건 아니지만 일본만 침략국가였다고 해야 할 까닭도 없다.
우리나라는 만주도 조선반도도 대만도 일본 본토와 마찬가지로 개발하려고 했다. 당시 열강이라고 했던 나라들 중에서 식민지의 내지화(본국화)를 꾀했던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타국과 비교하면 지극히 온건한 식민지통치를 한 것이다. 만주제국은 성립 당초인 1932년 1월에는 3천만 인구였으나 매년 100만명 이상 인구가 늘어 1945년 종전 때는 5천만으로 증가했다. 만주의 인구는 왜 폭발적으로 늘었는가. 그것은 만주가 풍요롭고 치안이 좋았기 때문이다. 침략이라 일컫던 행위가 자행되는 곳에 사람이 모일 리가 없다. 농업 외에 거의 산업이 없었던 만주의 황야는 겨우 15년만에 일본 정부에 의해 활력있는 공업국가로 거듭 태어났다. 조선반도도 일본통치하의 35년간 1천3백만이던 인구가 2천5백만으로 약 2배로 불었다.(<조선총독부 통계연감>) 일본통치하의 조선도 풍요롭고 치안이 좋았다는 증거다. 전후 일본에서는 만주나 조선반도의 평화로운 삶이 일본군에 의해 파괴당한 듯이 얘기들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정부와 일본군의 노력으로 현지 사람들은 그때까지의 압정에서 해방됐고, 생활수준도 현격하게 향상됐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만주와 조선반도와 대만에 학교를 많이 지어 현지인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 도로, 발전소, 수도 등 생활 인프라를 수없이 많이 남겼다. 또한 1924년에는 조선에 경성제국대학, 1928년에는 대만에 타이베이(臺北)제국대학을 설립했다. 일본정부는 메이지유신 이후 9개의 제국대학을 설립했는데, 경성제국대학은 6번째, 타이베이 제국대학은 7번째로 설립됐다. 그 뒤 8번째가 1931년의 오사카제국대학, 9번째가 1939년의 나고야제국대학 순이다. 일본정부는 오사카나 나고야보다도 먼저 조선과 대만에 제국대학을 설립했던 것이다. 또 일본정부는 조선인도 중국인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전후 마닐라 군사재판에서 사형에 처해진 조선출신 홍사익(洪思翊)이라는 육군중장이 있다. 이 사람은 육군사관학교 26기생으로, 유황도(이오지마)에서 용명을 날린 구리바야시 다다미치(栗林忠道) 중장과 동기생이다. 조선이름 그대로 제국육군의 중장으로 영전한 사람이다. 또 그 1기 후배로는 김석원(金錫源) 대령이 있다. 중일전쟁 때 중국에서 대대장을 했다. 일본병 약 1천명을 이끌고 몇백년이나 학대해온 전 종주국 중국 군대를 내쫓아버렸다. 그 공적이 높아 천황 폐하가 하사한 금 훈장을 받았다. 물론 창씨개명 따위 한 적이 없다. 중국에서는 장개석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니가타의 다카다 연대에 소속돼 교육을 받았다. 1기 후배로 장개석 참모인 하응흠(何應欽)이라는 인물도 있다.
이왕조(李王朝/ 조선왕조) 최후의 전하인 이은(李垠) 전하도 육군사관학교 29기 졸업생이다. 이은 전하는 일본에 대한 인질 같은 형태로 10살 때 일본에 오시게 됐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전하를 왕족으로 정중하게 대우했고, 전하는 학습원에서 공부한 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시게 됐다. 육군에서는 육군중장으로 영전해 활약하셨다. 이 이은 전하의 비가 되신 분이 일본의 나시모토미야 마사코(梨本宮 方子, 이방자) 비 전하다. 이 분은 쇼와 천황의 비 후보였던 고귀한 분이다. 만약 일본정부가 이왕조를 깨부술 작정이었다면 이런 고귀한 분을 이은 전하에게 시집보내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궁내성은 두 분을 위해 1930년에 새 궁을 지었다. 현재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별관이다. 또 청조 최후의 황제 역시 만주제국 황제였던 푸의(溥儀) 전하 동생(第君)인 푸켓(溥傑) 전하에게 시집가신 분은 일본 화족(귀족) 사가 집안(嵯峨家)의 사가 히로(嵯峨浩) 비 전하다.
이것을 당시 열강으로 일컬었던 나라들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일본의 만주나 조선, 대만에 대한 배려는 열강의 식민지통치와는 전혀 달랐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했으나 인도인을 위해 교육을 베풀진 않았다. 인도인을 영국 사관학교에 입학시키지도 않았다. 물론 영국 왕실이 인도에 시집을 보내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등의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다. 한편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5족협화(5族協和)를 제창며, 야마토(大和, 일본), 조선, 한(漢, 중국), 만주, 몽골 각 민족이 섞여 사이좋게 사는 것을 꿈에 그리고 있었다. 인종차별이 당연시됐던 당시에 획기적인 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뒤의 파리 강화회의에서 일본이 인종차별 철폐를 조약에 명기하도록 주장했을 때 영국와 미국은 일소에 부쳤다. 지금의 세계는 당시 일본이 주장했던 대로 되어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청국은 1900년 의화단사건 사후처리에 쫓겨 1901년 우리나라를 포함한 11개국과 의화단 최종의정서를 체결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청국에 군대 주둔권리를 획득하고 당초 2600명의 병사를 배치했다.(<노구교사건 연구> 하타 이쿠히코 秦郁彦, 도쿄대학출판회) 또 1915년에는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 정부와 4개월에 걸친 교섭 끝에 중국 주장도 반영해서, 이른바 대중국 21개조 요구에 합의했다. 이것을 일본의 중국침략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 요구가 열강의 식민지지배가 일반적이었던 당시의 국제상식에 비춰 그다지 이상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중국도 일단 완전히 승낙하고 비준했다. 그러나 4년 뒤인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을 허락받은 중국이 미국을 압박해서 대중국 21개조 요구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게 된다. 그래도 영국과 프랑스 등은 일본의 주장을 지지해주었다. (<일본사로 본 일본인-쇼와 편> 와타나베 쇼이치 渡部昇一, 祥傳社) 또 우리나라는 장개석 국민당과 합의하지 않고 군을 파병한 것도 아니다. 항상 중국쪽 승인하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1901년부터 주둔하게 된 일본군은 36년 뒤의 노구교사건 때조차 5600명밖에 없었다.(<노구교사건 연구> 하타 이쿠히코, 도쿄대학출판회) 이때 베이징 주변에는 수십만 국민당군이 포진해 있었고, 형태상으로도 침략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 외무대신으로 상징되는 대중국 융화외교야말로 우리나라의 기본방침이고 그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그런데 일본이 중국대륙과 조선반도를 침략했기 때문에 결국 미일전쟁에 돌입해 3백만이나 되는 희생자를 내고 패전을 맞게 됐다,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지금은 일본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미국 신중하게 파놓은 함정에 빠진 결과였다는 사실이 판명되고 있다. 실은 미국도 코민테른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 베노나 파일(Venona files)이라는 미국 공식문서가 있다.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 홈페이지에 실려 있다. 방대한 문서인데, 월간 <세이론(正論)> 헤이세이(平成) 18년(2006년) 5월호에 아오야마 가쿠인대학(靑山學院大學) 후쿠이(福井) 조교수(당시)가 내용을 간추려 소개해주었다. 베노나 파일이란 코민테른과 미국에 있던 에이전트들의 교신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미국은 1940년부터 1948년까지 8년간 이것을 모니터했다. 당시 소련은 1회용 암호책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것을 해독할 수 없었다. 미국은 미일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부터 해독작업을 개시했다. 그리고 무려 37년이나 걸려 레이건 정권이 등장하기 직전인 1980년에 이르러서야 해독작업을 완료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당시는 냉전의 한복판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것을 비밀문서로 분류했다. 그 뒤 냉전이 끝나고 1995년 기밀이 해제돼 일반에 공개됐다. 이에 따르면 1933년에 집권한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권 안에는 3백명의 코민테른 스파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최고위까지 오른 사람은 재무부 넘버 2인 재무차관 해리 화이트였다. 해리 화이트는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인 할 노트를 쓴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친구인 모겐소 재무장관을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을 조종하며 우리나라를 미일전쟁으로 몰아간다. 당시 루스벨트는 공산주의의 무서움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해리 화이트 등을 통한 코민테른의 공작을 받고 전투기 100기로 구성된 플라잉 타이거스를 파견하는 등 일본과 싸우는 장개석을 보이지 않게 강력하게 지원했다. 진주만 공격에 앞서 그 1개월 반 전부터 중국대륙에서 미국은 일본에 대해 비밀리에 항공공격을 개시했던 것이다.
루스벨트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공약해서 대통령이 됐기 때문에 미일전쟁을 개시하려면 아무래도 외관상 일본의 선제 공격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었다. 일본은 루스벨트가 파 놓은 함정에 걸려 진주만 공격을 결행하게 된다. 그러면 미일전쟁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일까. 일본이 미국이 요구하는 할 노트를 받아들였다면 일시적이나마 미일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할지라도 당시 약육강식의 국제정세를 보면, 미국이 제2, 제3의 요구를 해왔으리란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지금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백인국가의 식민지인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나 세탁기, 퍼스컴 등은 내버려 두면 언젠가는 누군가가 만든다. 그러나 인류역사 속에서 지배, 피지배 관계는 전쟁을 통해서만 해결돼 왔다. 강자가 스스로 양보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싸우지 않는 자는 지배당하는 걸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대동아전쟁 뒤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나라들이 백인국가의 지배로부터 해방됐다. 인종평등의 세계가 도래하고 국가간 문제도 대화를 통해 해결하게 됐다. 그것은 러일전쟁, 그리고 대동아전쟁에서 싸운 일본의 힘 덕분이다. 만약 일본이 그때 대동아전쟁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인종평등 세계의 실현은 백년, 2백년 뒤로 미뤄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일본국을 위해 싸운 조상들, 그리고 나라를 위해 귀한 목숨을 바친 영령들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그 덕에 오늘 우리들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대동아전쟁을 “저 아둔(愚劣)한 전쟁” 따위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전쟁 따위 하지 않더라도 오늘의 평화롭고 풍요로운 사회는 실현됐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당시 우리나라 지도자는 모두 바보였다는 얘기다. 하지 않아도 될 전쟁을 해서 많은 일본국민들 생명을 빼앗았다. 죽은 사람들은 모두 개죽음을 당했다고 말하는 식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사리가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지금에조차 한 번 결정된 국제관계를 뒤엎기는 지극히 어렵다. 미일 안보조약에 기초해 미국은 일본 수도권에도 좋은 기지들을 보유하고 있다. 이것을 일본이 돌려달라고 해도 간단하게 돌려받을 순 없다.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도 북방 4개섬은 60년 이상 불법점거당하고 있다. 다케시마(독도)도 한국의 실효지배가 계속되고 있다.
도쿄재판은 저 전쟁의 책임을 모두 일본에 덮어씌우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인드콘트롤은 전후 63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일본인들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일본군은 강해지면 반드시 폭주해서 타국을 침략한다, 그러니까 자위대는 될 수 있는 한 움직이기 어렵게 만들어놔야 한다는 것이다. 자위대는 영역경비도 불가능하고, 집단적 자위권도 행사할 수 없으며, 무기사용도 극히 제약이 많고, 또 공격적 무기 보유도 금지돼 있다. 외국의 군대들과 비교하면 자위대는 굴레로 칭칭 얽어매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돼 있다. 이 마인드콘트롤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우리나라를 자기 힘으로 지키는 체제는 결코 완성할 수 없다. 미국한테 지켜달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미국이 지켜주면 일본의 미국화가 가속된다. 일본의 경제도, 금융도, 상관행도, 고용도, 사법도 미국의 시스템에 가까워진다. 개혁의 온퍼레이드(총출연)로 우리나라의 전통문화가 파괴돼 간다. 일본에서는 지금 문화대혁명이 진행중인 것은 아닌가. 일본국민은 2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할 때 어느쪽이 더 마음 편히 살아갈까. 일본은 좋은 나라를 향해 가고 있을까. 나는 미일동맹을 부정하자는 건 아니다. 아시아지역의 안정을 위해서는 좋은 미일관계가 필수적이다. 다만 미일관계는 필요할 때 서로 돕는 좋은 어버이와 자식(親子) 관계와 같은 것이 바람직하다. 아이가 언제나 부모의 의존하는 관계는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자기 나라를 자신이 지키는 체제를 만드는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고 또한 외교교섭의 뒷방패가 된다. 외국에서는 매우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것이 우리나라 국민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금도 대동아전쟁 때 우리나라가 침략해서 아시아 나라들에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아시아 나라들이 대동아전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 둘 필요가 있다. 타이에서, 버마(미얀마)에서, 인도에서, 싱가폴에서, 인도네시아에서 대동아전쟁을 치러낸 일본의 평가는 높다. 그리고 일본군을 직접 접해 본 사람들 다수는 일본군을 높이 평가하며, 일본군을 직접 접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일본군의 잔학행위에 관한 얘기를 퍼뜨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알아 두어야 한다. 일본군의 군기가 타국에 비해 얼마나 엄정했던가를 많은 외국인들도 증언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침략국가였다는 따위의 말은 실로 억울한 누명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오랜 역사와 뛰어난 전통을 지닌 훌륭한 나라다. 우리는 일본인으로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긍지를 가져야 한다. 사람은 특별한 사상을 주입받지 않는 한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나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자연스레 사랑한다. 일본의 경우는 역사적 사실을 순수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 나라가 실시해온 일들이 훌륭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거짓이나 날조는 전혀 필요가 없다. 개별사실들에 눈을 돌리면 악행이라 할 만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선진국 중에서도 폭행과 살인이 일어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빛나는 일본의 역사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를 말살당한 국가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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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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