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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10 18:27 수정 : 2009.03.10 18:32

"우리가 가는 길이 역사입니다." 민족교육은 조국광복과 그 뿌리를 같이 하고 있다.

망향가를 부르는 재일조선인

아프다. 그리고 뜨겁다. 식민시대를 거쳐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처와 고통을 받아온 재일조선인들을 64년 동안 지켜온 산실, 일본 땅에서 꽃피운 민족학교(조선학교, 우리학교. 이 글에서는 '민족학교'로 명칭을 통일한다)를 바라보는 나의 심정이 그렇다.

왜 마음이 아프고, 이토록 심장이 뜨거운가. 그 이유를 말하려면 긴 호흡이 필요할 것 같다. 재일조선인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로 우리 사회에 널리 회자되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지 못했다. 민족학교를 떠올리며 나는 '조선의 힘'을 보았다. 조국이 왜 살아있는지도 보았다. 재일조선인에게 '민족학교'는 과거와 미래의 역사를 이어주는 생명줄이다.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낸 재일동포 사회의 그루터기다.

이 땅에서는 침묵했고 외면했던 재일조선인 학교. 그러나 남도 북도 아닌, 식민지배의 과거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일본 땅에서 숱한 탄압과 차별을 받으며 민족의 자주성을 지켜온 '조선의 상징'. 그 피눈물 나는 열정, 어디서 솟구친 것일까.

올해는 광복 64주년을 맞는 해이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생계형 이주와 강제징용, 징병 등으로 일본 내에 형성된 재일동포사회를 지켜온 민족교육운동의 역사도 조국광복과 그 뿌리를 같이 하고 있다.

조국광복 64주년, 민족교육 64주년

1945년 해방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재일조선인은 약 235만 명. 이들 가운데 97%가 38선 이남이 고향이었다.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며 원수의 심장부에서 짐승같이 살아왔던 조선인들이었다. 귀국을 준비하는 동안 그들은 자녀들에게 빼앗겼던 조선의 말과 글을 가르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재일조선인 모두가 귀국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맥아더 휘하의 연합군총사령부(GHQ)가 1인당 귀환지참금을 1,000엔으로 제한해 버렸다. 조국은 갈라진 채 고향인 남한에는 미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4.3 민중학살 같은 참혹한 비극 역시 귀국했던 동포들을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게 했다. 60만여 명의 재일조선동포들이 영영 잔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민족교육의 출발은 이런 기구한 역사를 배경으로 싹텄다. 민족학교의 최고 목표는 '조선말 교육'이었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일본어교육을 받았고, 일본에 끌려간 뒤부터는 아예 일본말을 사용해야 했던 조선인들이었기에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우리말과 글을 배울 기회마저 처음부터 갖지 못했던 자녀들에게는 더없이 절박한 과제였다.


1946년 국어강습소에서 우리말 공부를 하고 있는 재일조선인 학생들.

1945년 10월 조선인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총련의 전신)이 앞장섰다. 1946년 4월부터 일본 곳곳에 국어강습소(야학)를 세우고 민족학교의 씨앗을 묻기 시작했다. "돈 있는 자는 돈을, 힘 있는 자는 힘을, 지식이 있는 자는 지식을 내놓자"며 동포사회를 움직였다. 재일조선인들의 민족교육운동에 불이 지펴진 것이다. 일본 땅에 수많은 조선인학교가 세워졌다. 조련이 결성된 지 불과 2년 만에 소학교 541개, 중학교 7개, 청년학교 22개, 학원 3개가 들어섰을 정도였다.

조련이 친일·친미집단의 눈엣가시가 됐음은 물론이다. 조련이 일본공산당과 밀접히 연결돼 있는데다가 그 영향력이 확대되자 이를 경계한 연합군총사령부(GHQ)와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들의 자발적인 민족교육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조련을 해체시킬 목적이었다. 미 점령군은 1948년 1월 일본 당국에 민족학교 폐쇄를 지시했고, 이에 문부성은 3월과 4월 사이에 제1차 조선인학교 폐쇄령을 내렸다.

재일조선인들은 즉각 반기를 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민족학교를 지키려는 투쟁이 들불처럼 번졌다. 오사카와 고베지역을 중심으로 '한신교육투쟁'이라고 부르는 조선인 항거가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4월 24일, 미8군은 군중대회를 진압하기 위해 고베 일대에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수많은 동포들이 체포되고 구금됐다. 급기야 일본 경찰대가 오사카 부청 앞에 모여든 2만여 명의 우리 동포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꽃다운 열여섯 살의 김태일 학생이 총에 맞아 희생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태일 학생의 죽음이 전국에 알려지자 이에 격분한 재일조선인들은 전국 각지에서 거세게 민족교육수호투쟁을 벌여 나갔다. 저항의 횃불은 활활 타올랐다. 이 투쟁은 아무도 잠재우지 못했다. 결국 5월 5일 문부성으로부터 "일본 교육법령에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과외나 방과 후 조선인에 의한 독자적인 교육을 인정한다" 는 각서를 받아내어 승리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민족학교를 지키려는 민족교육운동의 성과는 더 큰 시련에 직면하게 됐다. 연합군총사령부와 일본 당국은 1949년 민족교육투쟁을 주도한 조련을 해산하고, 10월에 제2차 조선인학교 폐쇄령을 내렸다. 동포들은 강제 폐쇄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으나 300여개의 민족학교가 문을 닫았다. 자주적인 민족교육은 크게 위축되었다. 일본 정부는 민족학교를 접수해 조선인 학생을 격리 수용하고 일본 교장과 교사를 동원해 소위 '일본인이 될 것'을 강요하는 동화교육의 올가미를 목에 감기 시작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일본은 미군 통치에서 벗어났다. 자동적으로 재일조선인은 외국인이 됐다. 국적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 학생들에게 일방적인 서약을 강요하고 나섰다. "일본 법령과 학교규칙에 따를 것, 다른 학생에게 난폭한 짓이나 폐를 끼치는 행위를 하지 말 것, 학교 수용능력에 여유가 없어질 경우 재학 중이라도 퇴학 처분에 응할 것" 등이 그 내용. 노골적이었고 굴욕스러웠다.

기회는 위기의 순간 찾아온다고 했던가.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의 결성은 민족교육을 소생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 꺼져가는 민족학교의 불씨를 되살리는 쏘시개가 되었다. 재일조선인들은 총련의 주도 하에 동화교육에 내몰리던 공립학교를 인수하기 시작했다. 총련의 사업도 결성 초기부터 민족교육에 사활을 걸었다. 1955년 4월 23,000여 명이던 학생수는 1960년 4월 46,000 명으로 5년 사이에 갑절이 늘었다. 당시 민족교육에 총련과 재일조선인들의 열망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956년 4월에는 해외동포들의 첫 최고교육과정인 조선대학교가 창립됐다. 일본 정부가 민족교육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자체의 힘으로 총련의 전임일꾼과 교육간부(지도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민족교육의 최고기관이었다. 우리 동포들의 손으로 세우고, 우리 동포들이 직접 운영하는 대학으로서 전 세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로써 민족교육은 초급학교부터 대학에 이르는 정연한 교육체계를 독자적으로 갖추게 됐고, 고등교육에 대한 재일동포들의 숙원을 풀게 됐다.

1959년12월 14일, 열광적인 환송 속에 조선인을 실은 귀국선이 니가타항을 출항해 북한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에게 귀국선은 곧 '조국'이었다.

"이것이 바로 조국이구나"

1957년 4월에는 북한으로부터 교육원조비와 장학금 1억 2000만 엔에 이르는 민족학교 지원금이 송금됐다. 재일조선인들은 북에서 보내준 지원금을 '생명수'로 여기며 민족학교를 일으키는데 몸과 마음을 바쳤다. 민족학교는 활기를 되찾았고, 민족교육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지원금은 총련계 재일조선인들이 북한을 '조국'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계기가 됐다. "그 쪽도 어려울 텐데, 재일조선인의 교육에 이렇게 정열을 쏟고 있구나. 아! 우리에겐 김일성 수상이 있구나. 이것이 바로 조국이구나." (무라구치 토시야, <우리학교>, 2004) 어느 재일조선인 1세 할아버지의 이 회고는 당시 재일조선인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민족교육에 애정을 실었던 많은 재일조 동포들이 총련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재일동포중 97%가 38선 이남지역에 고향으로 두고 있었지만 이중 70%가 총련에 가입했고 남한 지역출신 재일동포 가운데 86,000여 명이 북한행 '귀국선'에 오른 것도 이러한 믿음 때문이었다.

이에 반해 한국 정부는 재일동포운동에 대한 이렇다 할 지원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아예 이승만 정부는 재일동포운동에 무관심했다. 더 나아가 많은 재일동포들이 총련에 가입하고 북한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가졌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총련이 주도하는 운동을 친북행위로 못질을 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군대를 동원해 정치권력을 탈취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때는 그게 더 심했다. 박 정권은 반공이데올로기를 권력의 지렛대로 삼아 남북 대결의 마당에 재일동포들을 이용했다.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을 장악했다. 민단 내 자기 반대파들을 축출하는가 하면, 재일동포운동의 역사적 과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이들을 반북 반총련 캠페인에 나서도록 했다. 슬프게도 일본 당국의 차별과 탄압 속에서 가뜩이나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재일조선동포들은 또다시 분열의 강을 건너야했다.

특히 1965년 박정희 정권 초기에 맺어진 한일조약은 재일동포 사회를 벼랑으로 내몰았다. 그 조약은 일본 내의 동포들을 한국 국적과 조선 국적으로 분열시킨 강압장치였다. 이로써 동포사회는 분열이 고착화되고, 재일조선인의 교육은 공식적으로 일본정부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협정 체결로 일본 위정자들은 식민지배의 과거에 대해 일말의 양심을 벗어 던질 수 있었다. 민족교육에 대한 일본 당국의 차별과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1965년 12월, 문부성은 지자체에 민족학교를 요리학원 같은 교육기관(각종학교)으로조차 인정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재일조선동포들의 투쟁은 끈질겼다. 외국인학교법안을 일곱 차례나 폐기시키는 저력을 발휘했다. 더 나아가 1966년에는 32개교, 다음 해도 28개교가 지방자치체로부터 각종학교로 인가를 받아 냈다. 1968년 4월 17일에 조선대학교, 1975년 1월까지 모든 민족학교들이 학교법인인가를 획득했다. 이 싸움에는 일본 시민사회의 살아있는 양심들이 함께 했다.

1970년 이후 민족교육운동은 교육지원금 쟁취투쟁으로 발전했다. 일본 당국이 재일동포 자녀들에게 민족교육을 받을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학교는 '1조교'로, 민족학교는 '각종학교'로 나눠 예산이나 수험자격 등에서 절대적인 차별을 계속하고 있었다. 세금은 일본 사람과 똑같이 내지만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동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1조교와 동등한 처우개선' 운동을 꾸준히 전개했다. 이 운동은 유엔 산하 기관(3개)과 일본변호사연합회가 일본 정부에 권고서를 제출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일본의 29개 도·도·부·현(都道府縣)과 많은 지방자치단체들은 민족교육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명목에 지나지 않는 소액에 불과하지만 조선학교들에 각종 명의로 보조금을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2003년에는 재일조선인과 일본 양심세력이 연대하여 조선고급학교 졸업생들의 일본국립대학 입학자격, 조선대학교 졸업생들의 일본대학원 진학 및 사법시험 1차시험 면제 등의 권리를 따냈다. 현재 과반수의 공·사립대학이 민족학교 졸업생들에게 일본의 고교생과 동등의 학력을 독자적으로 인정하게 된 것도 그들의 끈질긴 투쟁의 결과였다.

민족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이 몸동작을 하며 신나게 영어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끝나지 않은 민족학교의 시련

재일조선인들은 민족학교에서 우리의 말과 글을 통해 조선의 얼을 지켜왔다. 그래서 그들은 민족교육을 '재일조선인운동의 생명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민족교육이 걸어온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우리 학교를 지키려는 조선동포들에 대해 일본정부는 총과 칼로 위협하고 탄압을 일삼았다. 지금도 여전하다. 일본 정부는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식민지배를 반성하고 사죄하기는커녕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탄압을 노골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다. 특히 2006년 10월 북핵실험 이후 총련 동포들에 대한 탄압은 광기에 가까울 정도였다.

민족학교 주변 곳곳에 '학교를 폭파시키겠다'는 문서들을 붙이고, 학교에는 연일 불만을 품은 일본 극우자들의 폭언이 실린 전화가 빗발치고, 등교하는 여학생들의 치마저고리를 찢고, 심지어는 손가락을 잘라 우편으로 보내는 등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인권유린들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난 네가 조선인인 것을 알고 있다", "북조선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아다녔을 정도다. '조선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죄였다. 지금 재일조선인은 일본에서 일상적으로 '사상검문'을 받고 있는 것이다.

동포사회를 결속시키고, 이들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어 온 민족학교. 1세, 2세가 피와 땀으로 지켜내고 3세, 4세가 이어가고 있는 재일조선인들의 거대한 뿌리이자 고향 같은 존재. 그러나 지금 민족학교는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해방 이후 극심한 민족차별과 일본의 집요한 동화정책, 북한의 일본인 납치, 대포동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 이후 일본정부와 극우세력들의 노골적인 동포 탄압으로 통일시대의 자산인 민족학교·민족교육이 힘겨운 시련의 강을 건너고 있다.

민족학교에 다니는 학교와 학생수도 이런 암울한 상황 속에서 크게 줄었다. 많게는 600여개에 이르던 학교수가 현재 150여개로, 46,000여 명에 이르던 학생수가 현재 12,000명 정도로 4분의 1가량이 줄었다. 오죽했으면 2006년 9월 도쿄 시나가와에서 열린 제7차 중앙어머니대회에서 3년간의 새로운 과제로 '학령 전 어린이 1만명을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겠는가. 이는 민족의 대가 끊어질 수도 있는 위기 속에서 민족학교를 살리고 학생을 늘리기 위한 가장 절박한 요구에서 나온 것이었다.

민족학교의 어려움은 재정 압박에서도 나타난다. 일본의 사립학교에 준하는 교육지원비 획득과 학교기부금에 대한 세금공제 제외 등의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 현재 조선학교에 대한 지방자치단체 지원금은 전국 평균 연간 1인당 96,000엔으로 사립학교의 3분의 1, 공립학교의 9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모두 교사와 학부모들이 피눈물 나는 투쟁을 통해 얻어낸 것이다.

민족학교가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북한이 그동안 힘든 조건 속에서도 민족학교에 150 차례 이상 보내준 400억 엔의 교육지원금과 장학금 덕분이었다. 여기에 재일조선인 학부모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민족학교수호를 위해 자발적으로 내는 학교운영비도 큰 몫을 차지했다. 어머니들은 말한다. "민족교육을 지키기 위해 우리 어머니들이 하지 않는 일이 없다"고. 사실이 그렇다. 1세, 2세들이 세운 민족학교를 3세, 4세들이 학교운영자금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면서 광복 64년 일본 땅에 꽃피운 민족교육을 지켜가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조선의 힘은 살아있다. 도쿄 고토구 에다가와 조선학교 살리기 투쟁에서도 그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조선의 힘, 그래도 민족학교는 살아있다

"민족교육의 역사는 총련의 역사이고 재일동포 사회의 역사입니다. 민족학교에서는 민족의 얼과 말을 가르쳐주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민족학교를 통해 동포사회가 그물망처럼 하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족학교가 있는 한 동포사회도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고 남시우 전 조선대학교 학장)

민족학교는 64년 망향가를 부르는 재일조선인들의 뜨거운 심장이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재일조선인 동포들이 똘똘 뭉쳐 민족의 존엄을 고수하고 우리의 권리를 지켜온 조선의 심장이다. 조선을 위해 동포사회'를 위해 민족학교를 다니며 조선의 말과 정신을 배우는 재일조선인 학생들, 그들은 파릇파릇 자라는 통일의 풀잎들이다. 조국에 대한 사랑을 잊지 말라던 은사의 가르침을 받들어 이제는 어린 제자들에게 사랑과 열정, 참교육으로 보답하는 재일조선인 선생님들, 그들은 조선의 미래를 살아가는 통일의 전사들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 이후 일본 내에 속출한 '조센징' 대상 테러. 우리 대한민국 정부와 언론, 시민사회의 무관심 속에 이 일상화된 '전쟁' 속에 살아가는 재일조선인들. 그동안 우리는 대체 무엇을 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자성해 볼 일이다.

지금도 일본 당국의 차별과 탄압에 의해 삶을 위협받고 있는 60만 재일동포들, 그 중에서도 10만 조선적 재일조선인에 대해서는 뼈를 깎는 반성과 책임이 불가피하다. 옹졸한 이념의 잣대로 우리 동포들을 외면하는 일은 수치다. 총련 소속 재일조선인에 대한 그릇된 시선으로는 분단조국의 아픈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 조국분단으로 고통 받는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따뜻한 격려와 지원이 통일의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을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재일동포들은 모두 우리의 핏줄이며 한민족이다. 그것이 총련 소속이건 민단 소속이건 구별할 이유가 없다. 특히 재일동포들은 오늘날까지도 일제 침략의 수난사를 등에 지고 이역만리에서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조국분단의 고통을 우리 조선동포들에게 떠넘기는 시대는, 이제는 끝나야 한다. 해외에서 반세기가 넘도록 땀과 눈물로 우리의 말과 글과 정신을 지켜온 동포들을 껴안고 이제는 분단의 언덕을 넘어야 한다. 그 첫걸음이 바로 민족학교를 지켜내는 일이다.

해방 64주년은 재일조선인에게는 민족교육 64주년을 의미한다. 그 세월 동안 민족적 자각과 긍지를 심어준 민족교육운동을 벌이면서, 조선사람으로서 '조선의 힘'을 보여준 재일조선인들에게 희망의 연대를 보낸다. Ø굴렁쇠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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