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9.08.24 20:02 수정 : 2009.08.24 20:03

왼쪽부터 하토야마 유키오(사진 AP 연합), 오자와 이치로(사진 블룸버그 연합).

[일본 총선 D-5] 압승 예상 민주당 두 간판

닷새 앞으로 다가온 8·30 일본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하면서 자민당 장기집권체제가 막을 내릴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총선에서 민주당이 집권할 경우 일본 정치의 대표주자로 부상할 두 사람인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와 오자와 이치로 대표대행의 면면을 미리 살펴 본다.


압승 예상 민주당 두 간판
■ 하토야마 ‘실세총리’ 되나

재벌가문 세습의원 ‘하토야마’
겸허하고 부드러운 카리스마
자칫 허수아비 전락할 우려도

오랜 야당생활 끝에 역사적인 정권교체 이후 첫 총리 자리를 눈앞에 두고 있는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는 화려한 가문 출신이지만 서민의 눈높이를 강조한다. 기존의 세습정치인과 다른 행보를 걷고 있는 그의 정치스타일이 총선 이후 일본 정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가문과 돈

세습의원이 허다한 일본에서도 하토야마만큼 화려한 가문도 드물다. 할아버지인 하토야마 이치로는 자민당 창당의 주역으로 총리를 지냈다. 아버지 하토야마 이이치로는 외상을, 동생인 하토야마 구니오는 아소 다로 총리 내각에서 총무상을 지냈다. 중의원 의장을 지낸 증조할아버지 하토야마 가즈오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4대째 세습정치인이다. 센슈대 교수 시절인 1986년 39살의 늦은 나이로 동생보다 10년 늦게 중의원에 등원했지만 금새 두각을 나타낸 것도 ‘하토야마 가문’의 장손이라는 후광을 빼놓을 수 없다.

막강한 자금력은 일본 정계 최고를 자랑한다. 신당 사키가케와 민주당 등 창당과정의 막대한 자금도 하토야마가 댄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논픽션작가인 사노 신이치의 <문예춘추> 9월호 기고문을 보면 하토야마의 보유자산 규모는 주식(56억6천만엔) 예금(12억8천만엔) 부동산(15억엔) 등 86억엔에 이르고 있다. 세계 1위의 자동차 타이어회사인 ‘브리지스톤’ 창업자인 외할아버지인 이시바시 쇼지로에게서 물려받은 주식 등 상속재산이 하토야마의 자금력의 원천이다.


한·중 등 주변국과 우애 강조
집권 현실화하자 점점 보수화

정치스타일

<아사히신문>은 “서민총리로 불렸던 (그의 할아버지) 하토야마 이치로가 서민이 아니었고, 자신도 서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기울여서 겸허함을 유지하겠다고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는 듯하다”고 평했다. 정치가를 목표로 한 시절에 부인과 나란히 산 값싼 반지를 아직도 소중하게 끼고 다닌다. 그는 때론 분위기에 맞지 않게 발언해 ‘외계인’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어설프게 보였던 그의 정치 스타일은 어느덧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다. 간사장 시절 아소 내각의 빈틈을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게 파고들어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러나 총리 취임 이후 확고한 리더십을 보이지 못하고 당내 최대 실력자인 오자와 이치로 대표대행에 휘둘릴 경우 ‘허수아비 총리’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

이념

1993년 자민당 탈당 이후 신당 사키가케 창당과정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리버럴은 군사보다는 비군사”라고 주장했으나 점차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처럼 보수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는 내셔널리즘 선동정치를 혐오해 ‘대체 시설’ 건립을 주장하면서도, 평화헌법 개정에는 적극적이다. 집권이 현실화되자 대미관계 현안인 해상자위대의 인도양 급유활동의 지속을 약속하고, 집권시 솔선해서 북한선박 임검 관련 법안 처리를 약속하는 등 대북강경론을 주장했다.

일본 보수논객 중 한명인 에토 고이치 다쿠쇼쿠 대학 교수는 <문예춘추> 9월호 기고문에서 민주당 안에서 하토야마의 이념적 좌표를 오자와보다 더 왼쪽에 있다고 평가했다. 하토야마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정치이념은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우애정치’이다. “가치관이 다른 사회와 공생해가는 우애외교를 추진하겠다”며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과의 우호 관계를 남다르게 강조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 오자와 ‘수렴청정’ 하나

당내 최대파벌 거느린 ‘오자와’
강압적 리더십 불구 ‘선거 귀재’
공천 전담해 지분 더 날어날 듯

일본 정치의 ‘풍운아’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대표대행이 ‘양당제 정착을 통한 정권교체의 제도화’라는 오랜 정치적 꿈을 이룰 순간을 맞고 있다. 오자와는 1993년 자민당 탈당 뒤 비자민 연립정권 수립을 주도했다가 10개월 만에 실패에 그쳤다. 민주당 내 최대 실력자인 오자와가 이번 총선 이후 단명에 그쳤던 과거 정권교체의 경험을 교훈 삼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킹메이커

이미 50여 명의 자파 의원을 거느려 민주당 최대주주인 오자와의 선거 이후 파워는 더욱 막강해질 것은 분명하다. 민주당 압승의 예측보도가 현실이 된다면 200명 가까운 정치신인이 탄생한다. 지난달 21일 중의원 해산 전 민주당의 소속의원은 112명에 불과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오자와에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총선 이후 오자와 파벌세력은 최소 100명을 웃돌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오자와파는 지난 5월 대표경선에서 오자와의 ‘낙점’에 따라 일치단결해 하토야마 대표체제를 출범시키는 실력을 과시했다. 오자와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본인이 직접 총리나 각료에 오르기보다는 막후에 남아 킹메이커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파괴자 또는 선거의 귀신

1969년 정계에 입문한 오자와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 가네마루 신 부총재 등 자민당 실력자의 총애를 받고 승승장구해 40대에 자민당 간사장을 맡아 총리후보를 면접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1993년 당내 파벌투쟁에서 패해 탈당한 이후 신생당, 신진당, 자유당 등의 정당을 잇따라 창당했다가 해체를 반복해 정계의 ‘파괴자’라는 오명이 따라다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선거의 귀신이라는 별명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자민당 탈당 이후 만든 정당의 의석수를 선거 때마다 불려왔다.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에게서 전수받았다는 ‘3만 가구 방문, 5만번의 가두연설’ 등 그의 철저한 현장접촉형 선거 방식은 ‘정권교체 바람’에 강한 추진력을 제공했다.

집권땐 입각보단 막후 킹메이커
뚜렷한 이념없이 상황따라 변화

정치스타일

오자와 만큼 애증이 교차되는 일본 정치인도 드물다. 그를 분석한 책만 40권이 넘는다. “나를 따르라”라는 식의 리더십은 강압적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 기자회견도 잘 하지 않고, 얼굴 표정도 딱딱해 언론이나 여론의 인기도 높지 않은 편이다. 참의원 압승 이후인 2007년 11월 돌연 자민당과 대연정을 시도했다 민주당 집행부의 반발에 부닥치자 사의를 표명하고 잠적한 일은 오자와식 정치스타일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념

하토야마와 마찬가지로 오자와의 이념적 좌표를 설정하기란 쉽지 않다. 뚜렷한 이념적 색채를 고집하지 않고 시대에 상황에 맞춰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왔기 때문이다. 1996년 신진당 당수 시절 미-일 관계에 대해 “미국과 사이좋게 지내는 게 일본의 생존을 위해 전제조건인 이상 가능한 요구에 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뒤 유엔중심주의를 표방하며 이라크 전쟁에 대해 “미국 전쟁에 참가해서는 안 될 일”이라며 대미 비판으로 돌아섰다. 지난 2월엔 주일미군 개편문제와 관련해 “미군은 제7함대로 충분하다”고 발언해 파장을 불렀다. 애초 그는 일본의 구조개혁론자였다. 그러나 고이즈미 노선의 부작용이 두드러진 뒤 반대론자로 돌아서 2년 전 참의원선거 때 농가 호별 보상제를 공약하고 이번 총선엔 육아지원금 등 재정확대노선을 걷고 있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