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로, 이자는 1년 만에 돌연, 수상직을 사임했습니다만, 측근들의 말에 따르면 그이유가 ‘수상이라는 자리가 해보니 재미도 없고, 피곤하다. 난 싫어.’ 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한/조선반도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친 러일전쟁 당시, 일본 군인중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 1859-1930)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일본 근대 기병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프랑스 사관학교에 유학하고, 기병 제1여단장으로 러일전쟁에 참전해 당시 만주에서 세계최강으로 불리던 러시아 기병대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돌아와 승진을 계속해 육군대장이 되고, 나중에는 원수로 추대됩니다만, 본인은 자신이 군인으로써의 임무가 끝났다고 하며 원수직을 사양하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중학교의 교장 선생이 됩니다. 당시로써 이례적인 행동(육군대장, 원수 그리고 퇴임후에는 작위를 받은 귀족으로 유유자적한 생활등을 포기하고) 을 한 그는 자신이 겪은 전쟁의 잔혹상과 불합리성을 학생들 즉,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교육 시키기 위해 그 길을 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장군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국가주의나 제국주의적인 교육을 가능한 한 회피했으며, 당시로써는 당연한 ‘교련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등의 커리큘럼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첫째, 제국주의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학생들은 ‘조선’에 수학여행을 가게 했습니다. 1920년대 수학여행을 갔다 온 학생의 기행문이 남아있습니다만, 거기에는, ‘나는 조선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수학여행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조각, 단청 등의 아름다운 궁전, 한학, 서예 등의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고, 사람들은 예의바르며 당당했다.’, ‘이런 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식민지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던 듯 합니다.) 아키야마는 이순신 장군 연구등으로 조선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평소에도 조선 합병한 것에 반대 했다고 합니다. 조선,중국,일본이 근대화에 서로 도우고 힘을 합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을 막아내야 한다는 당시 제국주의 일본내에서는 받아 들이기 힘든 주장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러일전쟁의 영웅인 그로써도 비대해진 신 군부의 독주 체제를 견제 할 수는 없었죠. 결국 그가 명예와 권력을 버리고, 교육자의 길로 들어선 것은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세대로 키우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둘째, 관동대지진(1923년)이 일어났을때, 일본은 의도적 유언비어를 유포해, 많은 조선 사람들이 살해당합니다. 즉,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등이었죠. 이 이야기는 아키야마가 살고 있는 지방(에히메愛媛)에도 퍼져, 민심이 흉흉해집니다. 이에 아키야마는 학생과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것은 유언비어이고, 조선 사람들은 그럴 사람들이 아니다. 여러분들은 흔들리지 말기를 바란다고 하며 그 지방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범죄 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돌아다니며 설득했다고 합니다. 아키야마가 당뇨병으로 사망한 것은 1930년입니다만, 그 다음해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중일전쟁을 시작합니다. 근린국에 많은 피해를 끼치며 제국주의 파멸의 길로 달리기 시작한 것이죠. 그 선봉에 선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아베신조의 외할아버지 기시노부스케 입니다. 비록 젊어서는 군인으로 전쟁에 참가해 많은 죄를 지었지만, 나이가 들어 깨달았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생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람의 길`을 생각하고 자국과 이웃나라를 생각해 다음 세대의 교육의 길로 접어든 사람. 그리고 젊어서부터 얄팍한 권력욕에 사로잡혀, 사람들이 무작정 이웃나라를 증오하게 만들고, 자신은 한 나라의 리더 자리을 그냥 힘들다고 내던진 사람. 그 사람의 외할아버지는 ‘사람의 길’을 생각한 사람이 제일 우려했던 파멸의 길로 내달린 사람이고… 이 두 사람의 일본인의 길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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